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마냥, 몸이 뜻대로 음직이지 않습니다.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려 눈을 뜨자 밝은 빛이 각막을 아프게 찌릅니다.
차가운 물이 찰랑거리는 욕조에 몸이 애매하게 끼어 있어, 상당히 불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차가운 물이 담긴 욕조 안에 애매하게 늘어져 있습니다.
걸친 옷가지가 물을 흠뻑 머금은 탓에 몸이 무겁고, 그것들이 살갗에 들러붙어 춥고 으슬으슬하기까지 합니다.
욕조 바깥의 모습도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잔뜩 어질러져 있거든요.
아마도 누군가의 욕실인 것으로 보이는 이 장소의 바닥엔 온갖 물건들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쓰레기처럼 뒹구는 바디워시, 샴푸, 비누와 수건, 칫솔 등을 보고 있자면,
문득, 아픔이나 추위 따위가 아닌 다른 무언가⋯⋯
어쩐지 공허하고, 외롭고, 또 아주 서럽고 서글픈 어떤 감정이 느껴집니다.
잔뜩 어질러진 욕실 안, 옷을 입고 욕조 안에 처박혀서 우울해하는 당신.
KP:랜들, 지금부터 당신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선언할 수 있습니다.
현재 당신은 찬물이 가득 담긴 욕조 안에 옷을 입은 채 잠겨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나는 건: 당신의 이름 정도⋯⋯?
랜들 록스버그:(랜들 록스버그는 낯선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가 이 욕조에서 일어날 생각을 한 건 꽤 지난 후다. 어쩐지 이 차가운 수조와 자신에게서 특별한 이질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꽤 아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뒤로 상체를 쭉 당겼다가 한 번에 몸을 일으킨다.)
랜들⋯ 록스버그. (나는 그런 사람이다.)
뭐야, 이거?
(요람에서 나오는 대신 주위부터 둘러본다.)
그리고 당신은, 랜들 록스버그입니다.
이곳은 욕조의 안입니다. 그러므로 옷가지를 제대로 걸친 당신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마도⋯⋯ 욕실이겠지요?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고, 샴푸나 바디워시 등과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의 욕실로 보이는데 썩 정돈된 상태가 아닙니다.
랜들 록스버그:(랜들은 다시 한번 힘껏 물속으로 잠길 생각을 했다가 관두었다. 자신에게 아가미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 옷을 입은 채 물 안에 있으면 몸이 잠겨있다는 것 또한.) ⋯ ⋯ ⋯.
(버릇처럼 소매를 늘려서 옷의 원단을 살핀다. 다행이다. 이거 실크라서 뜨거운 물에 넣으면 안 됐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욕조 밖으로 나온다.)
KP:그렇습니다. 당신은 현재 실크로 된 홈웨어를 입고 있는데, 좋아했는지는 몰라도 꽤 즐겨 입은 옷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욕조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실크로 된 홈웨어와 손발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정작 당신의 머리는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습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욕조 바깥으로 나온 당신은⋯⋯
⋯⋯휘청거리며 바닥에 엎어져 버리고 맙니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당신은 걷는 법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걸어서 나갈 순 없겠습니다. 이동하려면 아무래도 기는 것밖엔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랜들 록스버그:(나는 그대로 휘청이고 앞으로 엎어진다. 걷는 법도 모르고, 쓰러졌을 때 팔을 뻗어 몸을 지탱해야 하는 법도 잊은 모양이다.)
(턱이 깨질 것 같이 아픈데, 그런 와중에도 바닥을 기는 상황에 대한 수치부터 느껴진다. ⋯ ⋯이곳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아, 씹⋯.
(팔다리를 휘청거려 문까지 쭉 기어갔다.)
KP:다행스럽게도 문은 열려 있고, 희미한 빛이 문틈새로 새어 들어옵니다.
욕실에 창이 없는 탓에 시간을 알 수 없었는데, 햇볕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아직 낮인 모양입니다.
당신은 휘청거리며 엉금엉금 기어 욕실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엉금, 엉금 기어서, 열려 있는 문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서고 나자.
이곳이 누구의 공간인지 알 방도가 없으나, 어렴풋이 느껴지는 기시감은 당신이 이 장소의 주인일지도 모름을 암시합니다.
KP:랜들,
욕실에서 빠져나와
거실에 진입했습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굉장한 익숙함과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을 고려할 때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곳에 오래 머물렀던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이 보이나요?
랜들 록스버그:(익숙하다. 익숙하지만 처음 깨어났던 욕조보단 낯선 기분이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내 소유의 자가인 것 같다. 이미 스무 해는 된 것 같은 넓고 견고한 주택. 화장실 바로 옆으로 3층까지 이어지는 나무 계단이 있고, 맞은편에 주방이 있다.)
(거실에는 2인용 소파. 쿠션이 두 개 놓아져 있다.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낮은 라운드 테이블. 리모컨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64인치 텔레비전. 꺼져있다. 지극히 '머글'스러운 가정집. 지팡이는 어디에도 없다.)
(하얀 카펫까지 기어서 향한다. 거실 바로 옆엔 런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창문이 있다. 커튼이 쳐져있지만.)
(그걸 열심히 걷어본다.)
KP:당신은 팔다리를 바들바들 떨면서 기고 또 깁니다. 이 집의 거실은─적어도 한 사람의 거주 공간으로서는─지나치게 넓어서, 욕실에서 창가로 향하는 그 거리가 마치 영겁처럼 느껴집니다.
2인용 소파와 테이블을 지나쳐, 텔레비전 옆을 지나서.
당신은 마침내 희고 반투명한 커튼이 달린 창가에 도달합니다.
그것을 걷자,
그것을 걷자, 런던의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모든 것은 지극히 제자리에 있습니다. 그 '제자리'가 무엇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신은 그렇다고 느꼈습니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이 도시의 여러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갑니다.
KP:그리고 그런 랜들의 손에
무언가가 걸립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작은 전자기기⋯⋯ 아무래도 휴대폰인 것 같습니다.
당신의 것으로 보입니다. 딱 보았을 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랜들, 휴대폰을 건드려 볼까요?
랜들 록스버그:(휴대폰을 붙잡아
밀어서 잠금해제한다.)
KP:명백해집니다. 이것은 당신의 휴대폰이 맞습니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 와중에도 자연스럽게─본능적으로
잠금을 해제할 수 있었으니까요.
상단바의 배터리 잔량이 2퍼센트를 가리킵니다.
아무도 오래 건들지 않은 듯, 금방 꺼질 것 같은 휴대폰에 먼지가 쌓여 있습니다.
헐.
뭔가 잘못됐어.
이 시나리오 자체가 잘못됐어 ㅋㅋ
당신은 당신의 휴대폰에 쌓인 약 마흔 건 이상의 부재중 전화를 발견합니다.
또한 약 쉰 건 이상의 문자 메시지도요.
일일이 눌러 확인해볼 수는 없었으나, 그것들은 대개 당신의 안부를 걱정하는 내용의 문자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쌓인 문자들은 07월 28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KP: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마지막으로 읽은 문자의 발신인을 확인합니다.
「Caleb Rankin」
그 이름을 읽은 순간 휴대폰이 방전됩니다.
랜들, 이제 무엇을 해볼까요?
⋯ ⋯ ⋯.
(잠깐? 운이 좋으면 이 근처에 충전기를 꽂아두지 않았을까.)
ㅇㄸ?
해봐라.
잠깐.
그래 해봐라
대신 어려운 성공.
당신은⋯⋯
문득 지독한 공허함을 느낍니다.
어쩐지 공허하고, 외롭고, 또 아주 서럽고 서글픈 어떤 감정 말입니다.
그것이 한층 심해져 이젠 물리적인 고통마저 느껴지려던 찰나,
(그는 한손에 희고 작은 상자를, 다른 한손엔 비닐 봉투를 들고 있었고, 전혀 거리끼는 기색이 없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완연한 무표정으로 신발을 대충 벗던 그는⋯⋯)
(고개를 들었고⋯⋯)
(그리고 당신을 본다.)
⋯⋯. (깜빡.)
랜들?
시선을 마주합니다. 당신은 '본능적으로' 눈치챕니다.
그는 당신이 읽은 '마지막 문자'의 발신인입니다.
「Caleb Rankin」이라 저장되어 있었던 바로 그 사람, 말입니다.
랜들 록스버그:(바짝 바닥에 엎드린 채로 올려다본다.)
(눈살을 찌푸린 채로 감았다 뜨는 것을 반복하다가⋯)
⋯칼렙, 랜킨?
???:(그는⋯⋯ 입을 살짝 벌리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깜빡. 깜빡. 대답은 한참 뒤에야 느리게 나온다.)
케일럽.
칼렙이 아니라. 모지리야.
(눈매가 갸름해진다.) 아냐고?
⋯⋯왜 이래? (그가 현관 안으로 들어선다. 왼손에 들린 비닐 봉투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애초에.
너⋯⋯ 욕조에서 왜 나온 거야? 바닥이 흠뻑 젖었잖⋯⋯, (깜빡. 깜빡.) ⋯⋯.
(그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랜들?
랜들 록스버그:(랜들, 하고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무언가 탁 풀렸다는 것마냥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지쳤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있어서 문자 못 읽었는데.
뭐라고 보냈어?
???:(그는 우선 대답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테이블 위에 상자와 비닐 봉투를 내려 두었다.)
(그리고선 당신에게로 향한다. 다소 조급한 발걸음이다.) 너⋯⋯,
(⋯⋯그가 당신을 내려다본다.) 왜 안 일어나?
다리에 문제 생겼어? (그렇다. 아파? 라거나 다쳤어?가 아니다.)
랜들 록스버그:(아⋯ 절대로 내가 물어본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는 모습을 보니, 내가 알던 케일럽 랜킨 씨가 맞다.)
(바닥에 딱 붙은 채로 들숨, 날숨⋯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못 걷겠어.
나를 알아? (다시 물었다.)
여긴 내 집이지?
당신은 뭐야?
???:(그는 이상한 표정이 된다.) 잠깐만.
잠깐만. 이게 아니야.
나를 알아?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뭐야?라니.
아니야. 잠깐만⋯⋯, (그가 웅크리듯 해서 앉는다. 시선이 가까워진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너⋯⋯,
랜들. 잠깐만. 잠깐⋯⋯,
⋯⋯기억에 문제가 생겼어?
랜들 록스버그:(그런 눈앞의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질적이지 않은 건지, 아니면, 원래 그랬던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되레 비뚜름하게 대꾸했다.)
대답 좀 해요. 사람이 물어보잖아.
(그는 손을 심하게 떨고 있다. 욕조에서 갓 나온 당신보다도 더.) ⋯⋯이게 아니야. 잠깐만.
이걸 바란 게⋯⋯ 너⋯⋯,
(그는 한참을 횡설수설하다가,)
(그러다가, 손을 뻗어 당신의 어깨를 세차게 잡아챈다.) 랜들.
랜들. 나, 나 알잖아. 왜 이래?
이런 장난 재미 없어.
랜들 록스버그:장난 아니야. 나도 진짜로 재미없어.
왜 이래?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사람 상대로 혼잣말만 하고⋯ 아, 답답해.
(손을 뿌리친다.)
???:(뿌리쳐진 탓에 일순 균형을 잃는다. 뒤로 넘어질 뻔 한 그는 한손으로 바닥을 짚어 간신히 앉은 자세를 유지한 채, 어안이 벙벙한 낯이 되어 당신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아무것도?
랜들 록스버그:(입을 꾹 다물고, 다소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바라본다.)
(이상한 자세로 공중에서 상체를 유지할 코어는 안 되는 것 같고, 몸을 일으키니 어딘가에 기대서 앉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내 이름하고⋯ ⋯.
당신 이름.
이 집 구조 정도는.
(당신 이름.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다른 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얼굴이 훅 가까워진다.) 내 이름은 기억하는 거지?
나만⋯⋯ 기억하는 거잖아.
맞지?
랜들 록스버그:(거리가 순식간에 몇 센티로 줄어든다.) 카, 일렙.
랜들 록스버그:(아른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랜킨.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 케일럽이라고.
다시 발음해 봐. 케일럽이라니까.
알파벳 케이─ 할 때의 그 케이.
(가까워.) 됐어?
떨어져.
???:(그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물린다.) ⋯⋯.
⋯⋯밥 먹자.
나 케이크 사왔는데⋯⋯. (그는 허둥거리며 테이블로 팔을 뻗는다.) 딸기⋯⋯,
⋯⋯랜들. 나 이러려던 게 아니야. 나 그냥⋯⋯,
케이크⋯⋯ 너 배 안 고파?
KP:그 즈음 랜들, 당신이 자각한 것이 하나.
당신은 지금 아주 슬프고, 공허하고, 외롭고, 서럽고, 서글프다는 사실.
그리고 눈앞의 상대는, 어쩐지, 당신의 그런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만 같습니다.
랜들 록스버그:뭐라는 거야⋯. (하나도 안 들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 딸기랑 케이크 밖에 못 들은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아주 슬프고, 공허하고, 외롭고, 서럽고, 서글퍼서⋯) 배고파.
먹자고. 케이크. 잠시만⋯⋯.
(곧 몸을 일으킨 그는 아주 서두르는 걸음으로 걸어, 익숙하게 당신의 주방에 들어가 식기를 준비해 온다.)
(각진 흰 상자엔 금펄까지 뿌려져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고급 제과점의 것이다.)
(그는 상자를 열고 케이크를 꺼낸다. 빵칼이 딸기를, 생크림을, 그 아래의 시트를 부드럽게 가른다.)
(⋯⋯그러나 그는 손을 떨고 있다. 저항감이라곤 없다시피 한 제과를 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케이크를 여섯 등분한다. 한 조각을 당신에게 내민다.) ⋯⋯너 포크 쓰는 법은 기억하지?
랜들 록스버그:(그 일련의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다가⋯ 포크로 당신의 팔을 쿡 찌른다.)
뭐야?
???:(한숨 푹 쉬면서 중앙의 초콜릿을 케이크 위에 얹어 준다. 밀크 초콜릿 위에 흰 아이싱으로,
"Happy Birthday.")
너 먹어.
(무언가 낯설다. ⋯생일인가, 나?) 네 생일이야?
???:먹으라면 그냥 먹어. (케이크엔 손도 대지 않는다.) 그거 비싼 케이크야.
(케이크 접시를 들어 올린다.) 끝까지 설명 안 해줄 건가?
???:(잘린 딸기 단면만 노려보던 그가 고개를 든다.)
(다시 시선이 마주친다.) 나는⋯⋯,
내가⋯⋯,
⋯⋯.
아. 씨발. 싫어. 꺼져. 말 안 할 거야. 케이크나 처먹어. 진짜 짜증 나⋯⋯. (마른세수.)
랜들 록스버그:(물고 있던 포크로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자르고⋯ 찌르고, 케일럽을 한번 보고.)
(초콜릿 장식을 케일럽 입 안에 넣어준다.)
해피 버스데이, 미스터 랜킨.
???:(그는 자신 몫의 케이크는 덜지도 않았다. 애초에, 가져온 접시도 한 개뿐이었다.)
(그러므로 빵칼을 든 채 멀뚱멀뚱 서 있다가, 입안에 초콜릿이 들어와 잠시 당황한 기색이 된다.)
(대답 없이 물고만 있다.)
(그러다가,) 그거 너 다 먹으라고 사온 거야.
(초콜릿이 입술 사이에서 녹는다. 뒤늦게 우물거리기 시작한다.) 케이크.
동갑이야.
???:⋯⋯스물일곱. 너 진짜 다 날아갔구나.
씨발 이게 아닌데⋯⋯ 아⋯⋯ 짜증나.
???:(목울대가 울렁인다. 다 녹은 초콜릿이 넘어간다.)
왜 궁금한 거야?
랜들 록스버그:보호자라고 하기엔 동갑인데,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싸고돌고,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기엔 내 집을 너무 자연스럽게 돌아서.
어때, 내 추리?
???:기억이 날아가도 여전히 랜들 록스버그구나 싶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케이크 먹어. 나 냉장고 정리할 거야. (테이블을 짚고 몸을 일으킨다.)
???:(입매가 미묘하게 비틀린다.) 이 질문을 네가 나한테 하는 날도 오네.
(비닐 봉투를 들어올린다.) 음. 결정했어. 어쩌면⋯⋯ 어쩌면 행운일지도 몰라.
랜들 록스버그:(무시하고 케이크를 퍼먹기 시작한다.) 잘 다녀와.
KP:당신에게 흘끔 시선을 준 그가 사라지고, 당신은 케이크를 퍼먹기 시작합니다.
한 조각. 푹신한 생크림과 설탕 시럽을 발라 굳힌 딸기가 입안에서 녹듯이 사라집니다.
객관적으로 그것은 분명 꽤 맛있는 케이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맛을 대단히 특별한 것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섯 등분한 케이크의 한 조각을 몽땅 집어삼킨 이후에도,
랜들 록스버그:(이 달디 단 케이크를 세 입 먹고 든 생각은 '물린다'였다. 랜들은 기묘한 기분으로 접시를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케이크의 받침을 들어서 반사적인 행위처럼 그것을 통째로 퍼먹기 시작한다.)
(어쩐지 멈추는 게 힘이 든다⋯)
토할 것 같아⋯. (멈추지 않는다.)
KP:다시 한 조각. 생크림과 딸기가 입안에서 으깨져서 사라집니다.
여전히 당신은 그 맛을 대단히 특별한 것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섯 등분한 케이크의 둘째 조각을 몽땅 집어삼킨 이후에도,
KP:다시 한 조각. 느끼한 생크림과 차가운 딸기가 입안에서 부서집니다.
당신은 그것이 물린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다시 한 조각.
마지막 조각까지 전부 먹어치웁니다.
???:(그 즈음 그가 돌아온다.) 케이크 남은 거 냉장고에 넣⋯⋯,
(깜빡.)
다 먹었어?
랜들 록스버그:(속이 메슥거린다.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래서 나는 보는 앞에서 헛구역질을 몇 번 한 뒤에, 바로 바닥에 케이크를 게워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추잡스러운 일인지는 전부 잊은 모양이다.)
(새콤달콤했던 딸기의 형태가 으스러진 채 하얀 크림과 함께 엉망으로 바닥에 흩어진다.)
배고파.
야, 야, 잠깐만. (헛구역질 두 번. 그가 당신의 팔을 잡아챈 순간.) 잠깐만, 너 그거 아끼는 카펫─⋯⋯,
(헛구역질 세 번. 당신은 게워내기 시작한다.)
(당신은 죄다 으깨지고 뭉개진 케이크를 전부 토해내고, 그는 당신의 팔 한 쪽을 잡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다.)
(그리고 정적이.) ⋯⋯.
너 괜찮아?
배가 고프다고?
랜들 록스버그:(붙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입가를 연신 문지른다.) 응⋯.
???:씨발아, 그걸 한번에 다 처먹으니까 게워내지!
아, 아이 씨⋯⋯ 나와! (잡은 팔을 확 끌어당긴다.)
식탁에 앉아 있어. 아⋯⋯ 카펫.
스코지파이로 카펫까지 복원할 수 있나⋯⋯? (깜빡. 깜빡.) 일단 가서 앉아.
랜들 록스버그:(팔에 이끌려 끌려나간다. 그러자, 이번엔 휘청거리면서도 중심을 잡는다.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우뚝 서있기만 한다.) 지팡이 없던데.
(깜빡.) 못 걸어?
나 어디 있어?
???:식탁에 앉아 있으라고⋯⋯ (한숨 푹.) 배고프다면서.
이거 치우고 갈 테니까.
집 구조 안다면서.
랜들 록스버그:(그 말을 듣고 직후 바로 두리번거린다. 부엌을 찾는 듯했다. 위태롭지만 어찌저찌 걸어간다.)
(식탁에 앉진 않고⋯ 냉장고를 열어본다.)
KP:당신을 바라보는 그를 뒤로 하고 주방으로 향합니다. 이 집은 너무 넓습니다.
높은 테이블에는 의자가 네 개 딸려 있고,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아일랜드 식탁 너머에 조리대와 싱크대, 냉장고 따위가 위치해 있습니다.
희고 깨끗한 냉장고 안엔 식재료가 정리되어 들어가 있습니다.
과일류는 왼쪽 칸, 채소류는 오른쪽 칸. 고기와 생선도 조금 있고 달걀도 정리해 두었습니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는 빵 봉투라거나 실온에 보관해야 할 잼 따위도 두었으니, 아무래도 꽤 본격적으로 장을 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단순 방문객이 보는 수준의 장은 아니었다, 이 말입니다.
원한다면 먹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우리 진짜 무슨 사이야?
???:(그는 여전히 거실에 있고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듣지 못한 것인지 무시한 것인지, 혹은 대답했는데 당신이 듣지 못한 것인지.)
(당신에겐 알 방법이 없다.)
랜들 록스버그:(그러면 자신도 케일럽의 경고를 듣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꺼내 먹기 시작한다. 우선은⋯ 먹다 남은 것 같은 샐러드부터.)
KP:정말로, 먹다 남긴 샐러드인지라 야채는 숨이 조금 죽었고 드레싱은 바닥에 고여 있습니다.
그다지 맛있을 메뉴는 아닙니다만 당신은 순식간에 한 그릇을 다 비웠습니다.
그러나 부족하다는 기분이 듭니다. 왜냐하면,
랜들 록스버그:(그다음으로는 양배추 반 통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통째로 씹어먹으며 케일럽이 있었던 자리로 간다.)
???:(그는 마침 카펫을 다 치우고, 케이크 상자와 잔해 따위를 정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린다.)
야. 야.
너 뭐 해. 미친!
(양배추를 계속 우물거린다⋯)
???:아이 씨⋯⋯ 야, 네가 토한 건 치워야 할 거 아냐.
저 카펫 비싼 거라고 내가 오십 번도 넘게 들었어. (양배추를 빼앗아 든다.) 해주겠다고.
가서 앉아. 생으로 씹어먹지 말고. 해주겠다니까?
음⋯⋯ 포토푀. ⋯⋯뜨거운 거 먹을 수 있어?
그래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손목을 잡고 걷기 시작한다. 걷는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다.) 무슨 새끼 사슴처럼 걸어, 사람이.
받쳐줄 테니까 중심 좀 똑바로 잡아 봐.
랜들 록스버그:(그대로 질질 끌려간다. 몇 번 걸었다고 제법 사람꼴처럼 걸을 수 있었다.) 손 아파.
???:(대답 없이 그대로 식탁 의자에 앉힌다.) 앉는 건?
앉아 봐. 씨발 이렇게까지 백치가 될 줄은⋯⋯.
랜들 록스버그:(의자 뽑아서 앉는다. 조금 어설프지만 과하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환자가 된 기분이야.
???:씨발. 팔자에도 없는 병구완이나 하고 있고.
앉아 있어⋯⋯ 배고프면, 잠시만. (봉투를 뒤적거린다.)
(포장된 쿠키 두 개를 꺼내서 앞에 대충 던져 준다.) 그거 씹고 있어.
다행스럽게도 식탁과 조리대 사이엔 아일랜드 식탁 하나뿐이라, 당신은 그와 대화할 수 있고 그를 볼 수 있고 그에게 간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테이블 위.
그가 당신에게 던져준 쿠키 두 개 외에도, 눈에 띄는 게 하나.
휴대폰입니다. 당신의 것과는 다른.
그의 것으로 보입니다.
랜들 록스버그:(쿠키 두 개를 한 입에 밀어넣고 손을 뻗는다.)
(자신의 것과 비슷해서, 제 것인 줄 알았다. 정말로. 그렇게 이번에도⋯ 밀어서 잠금해제.)
KP:케이크와 다르게 오트밀 쿠키는 너무 달거나 물리지 않습니다. 덕분에 당신은 쿠키 두 개를 순식간에 해치웁니다.
밀어서 잠금해제. 그러나 명백해집니다. 당신의 것과는 화면부터가 달랐으니까요.
상단바의 배터리 잔량은 70을 넘겼고, 절대로 금방 꺼질 것 같진 않습니다.
메모장이 켜져 있었기에 당신은 곧바로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KP:네 개의 메모 이후론 스크롤을 넘겨야 계속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스크롤을 넘겨볼까요?
KP:스크롤을 넘겨야 계속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스크롤을 넘겨볼까요?
KP:마지막 메모입니다. 상단바에서 날짜가 깜빡거립니다.
오늘의 날짜는 2007년 09월 01일.
방금 당신이 본 것이 바로 오늘자의 메모입니다.
너 어딨어?
케일럽 랜킨:(주방에서 달그락거리던 참이다.)
(칼질하는 소리 탓에 초인종도, 당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랜들은 주머니에 남의 휴대폰을 집어넣는다. 케일럽 랜킨에게 이런 대화를 나누면 분명 그는 잡아떼며 물증을 찾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까지 나는 걸 보면 기억이 거의 돌아오긴 한 모양이야.)
2 1. 먹금 2. 무시
랜킨, 내 말 안 들려? (다시 한 번 부른다.)
밖에 사람이 왔어.
(그리고 꽤 오래 대답을 기다리다가, 유예 시간을 다 줬다는 듯 일어나서 문을 열러 간다.)
케일럽 랜킨:(그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당신을 무시하고 있었을까?)
(어느 쪽이건, 이제 당신이 알 도리는 없을 것이다.)
하고, 당신이 오기까지 초인종은 몇 번을 더 울렸습니다.
아주 익숙하게 느껴지는 문고리를 잡아 돌려 열자,
???:(그러자 아주 당연하게도,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다.)
(짧고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카락. 끝만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노란빛이 섞인 푸른 눈동자.) ⋯⋯너!
싸웠다 해도 그렇지. 이렇게 잠수 타는 건 아니지 않아!?
어떻게 내가 네 집까지 찾아오게 만들 수가 있어!?
KP:처음 보는 여자입니다. 기억이 몽땅 날아갔으니 당연하지만요.
그러나 지금, 당신이 그녀와 일면식이 있는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상추 반 통. 아작아작 씹다가 빼앗겼습니다.
지금까지 먹은 걸론 전혀 성에도 차지 않습니다.
넌 항상 이런 식이야!
랜들 록스버그:(모르고, 나를 향해 짜증을 내는, 귀여운 여자.) ⋯⋯.
배고프다.
???:(여자의 푸른 눈동자가 당신을 쏘아본다.) 내가 연락 좀 자주 하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어? 연락이 그렇게 별거야?
그게 그렇게 아니꼬와? 꼬박 한 달을 잠수 탈 만큼?
왜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데⋯⋯?
랜들 록스버그:(대화가 전혀 오가고 있지 않아서, 랜들은 집 안에 있는 시뻘건 머리통과 미묘하게 겹쳐보기 시작했다. 입맛을 몇 번 다시고, 이미 먹어치웠는지 텅 비어버린 뇌로 하고싶은 말만 뱉었다.)
랜킨이 밥을 안 줘⋯.
나 아까 케이크 토했고, 샐러드는 먹다 남았고, 양배추는 뺏겨서⋯ ⋯ ⋯.
뭐라도 먹어야 해.
실례할게.
(그리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다시 정신을 차렸다고 자각이 들 때쯤엔 이미 시퍼런 주검의 물어뜯긴 팔을 들고 있었다. 이 순간, 내가 깨달은 것은 사람의 신체는 그리 만만하지 않아서 쉽게 뜯어지지 않는다 라는 점이다.)
(그런데 나는 ⋯ 2 1. 아직도 배고프다 2. 이제 괜찮아)
(배가 전부 채워져서, 배고프다는 기분이 잠깐 지워져서 ⋯정신이 든 모양이라서.)
(비로소, 도륙난 시체에 대한 이질감을 자각한다.)
(툭 놓는다.) ⋯ ⋯헉.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다.) 우, 우욱. 씨발⋯ ⋯.
(휘청거리는 다리. 뒤로 넘어진다.)
으, 으아아아아⋯.
아아아악⋯⋯!!!!!
무언가 달라졌다고 해서 치열의 구조나 치악력 따위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라, 당신은 여전히 무딘 인간의 이빨로 그녀의 살을 잘라내기 위해 꽤나 노력해야 했습니다.
크게 벌렸던 턱은 얼얼하게 아프고, 입안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살점은 그로데스크해 보입니다.
입술은 물론이고 얼굴과 손아귀까지 모조리 핏물로 번들거립니다.
그 상태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지듯 해서 비명을 지르다 보면,
그러니까 마땅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랜들, 방문객 마야 시나트라를 잡아먹었습니다. (당신이 그녀가 누구였는지를 기억할 일은 아마 없겠지만, 그녀는 당신의 현 여자친구였습니다.)
사람을 잡아먹어 당신의 불온한 충동이 고개를 듭니다.
현 시각 01시 45분 기준, 지금부터 리얼타임 10분에 한 번. 당신은 눈앞에 있는 것을 집어삼키거나 혹은 nD4점의 이성을 차감합니다.
차감하는 이성은 중첩됩니다.
(지금껏 당신이 내던 소리에 반응하지 않던 그가 그제야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야?
록스버그? (그는 여전히 주방에 있다. 목소리가 다소 아득하게 울린다.)
랜들 록스버그:(랜들은 또다시 먹은 걸 전부 게워내기 시작한다. 그것도 걸어 다니면서!)
(그리고 케일럽 랜킨 쪽으로 간다. 표정이 창백하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래, 랜킨⋯ ⋯.
케일럽 랜킨!!
(이쯤 한 번 더 쏟아낸다. 두 걸음 더 걸으니 바로 눈앞이다.)
케일럽 랜킨:(결국 조리대를 정리하고 황급히 달려나온 그가⋯⋯)
(⋯⋯당신을 본다.)
(당신은 온통 피투성이다. 머리칼은 핏물에 젖어 굳어버렸고, 뺨과 입술과 손이 모조리 피로 번들거려 마치 삼류 영화 속의 분장을 잘못한 살인마처럼 보였다.)
(그 상태 그대로,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으면서,)
(당신이 온다.)
(네가 온다.)
(내게로.) ⋯⋯너.
너,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마 이건 랜들 록스버그가 물었어야 할 질문일 것이다.)
랜들 록스버그:(게워내고, 전부 게워내다 못해 위산까지 쏟아지면,)
(방금의 역함은 또 어디로 가버렸는지 머리가 멍해진다.)
(본능만이 그를 이끈다. 걷는 것이 버겁고, 배고프면 울고 싶고, 신생아라도 된 기분이다.) 랜킨.
밥 다 됐어?
또 토했어요! 또 토했다니까요!
속이 텅 비었습니다. 가진 게 없어요!
기억도! 과거도! 마음도!
그래서 당신은 혼자서 서럽고, 외롭고, 슬프고,
아주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배가 고픕니다! 당신은 여전히 배가 고픕니다!
지금까지 먹은 걸론 전혀 성에도 차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바로 삼키면 당장 부정적인 감각에서 벗어나 행복해질텐데❤
KP:랜들, 선택합니다.
삼키거나 혹은
이성을 차감하거나.
랜들 록스버그:(그래서 나는 선택해야 한다.
1 1. 너 2. 냉장고)
(ㄹㅇ? 2 1. ㅇㅇ 2. 이성차감 하자♡)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케일럽 랜킨:(반사적으로 그가 물러선다.) ⋯⋯너 뭐 했냐고.
뭐, 뭐 했냐니까? 왜⋯⋯,
왜 피가⋯⋯ 너⋯⋯,
너 사람 죽였어?
누구?
랜들 록스버그:(눈이 텅 비었다.) 먹었는데.
현관에 있어.
가서 봐.
(랜들 록스버그의 그런 눈을, 케일럽 랜킨은 처음 봤다.)
(그래서 되묻지 않는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당신을 지나쳐 현관으로 향했고⋯⋯)
(그리고⋯⋯ 곧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이 미친⋯⋯.
이, 이 미친⋯⋯.
랜들 록스버그:(그 사이, 나는 떠올린다. 케일럽 랜킨이
저녁 식사를 만들던 것을.)
(주방에 있었지.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식재료를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먹기 시작한다. 자른 것, 다진 것, 구운 것, 날 것. 전부!)
그러자 모든 것이 조금 나아진 기분이 듭니다.
공허함과 외로움이 가시고 굉장한 충족감과 함께 빠듯한 포만감이 찾아듭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케일럽 랜킨:(랜들 록스버그가 그렇게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고 있을 동안, 그는 현관에서 랜들 록스버그가
벌인 일을 어떻게든 수습하고자 애쓰는 중인 것 같았다.)
(무거운 것을 질질 끌고 들어오는 소리, 철퍽거리는 소리. 스코지파이! 하고 외치는 목소리는 우스울 정도로 떨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케일럽 랜킨이 다시 당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록, 록스버그. 랜드⋯⋯,
(깜빡. 깜빡.)
⋯⋯나, 나 이러려던 게,
(그는 당신의 모습을 본다.) 잠깐. 나 이러려던 건⋯⋯,
⋯⋯.
랜들 록스버그:(다 먹고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빨 때 즈음, 케일럽 랜킨이 돌아온다. 배가 부르다. 공복이 불쾌하기보다 편안한 건 처음이다.)
뭐 했어?
케일럽 랜킨:(반사적으로,) 이러려던 건 아니야.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나는 그냥, 아주 살짝, 사, 살짝만⋯⋯.
⋯⋯⋯.
왜 욕조에 넣었어?
이러려던 건 아니라.
그냥⋯⋯. (고장난 테이프마냥 대답을 반복한다.) 정말 이러려던 건 아니라⋯⋯.
록, 록스버⋯⋯, 랜들⋯⋯ 랜들. 너 씻어야 해. 피, 피가.
뭐 했냐고 물었잖아!!
케일럽 랜킨:(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르겠다. 그가 반사적으로 걸음을 물린다.)
(하필이면 당신이 온 사방에 핏물로 발자국을 찍어둔 터라, 발을 헛디뎌 뒤로 넘어져 버린 그의 손과 옷자락에 누군가의 핏물이 옮겨붙는다.)
나⋯⋯ 나는 그냥.
혼자서 서러운 게⋯⋯. (깜빡.)
외롭고, 슬픈 게 싫어서. 나 그냥⋯⋯. (대답이 이어지지 않는다. 둘은 언제나 불통이었다.)
⋯⋯.
랜들 록스버그:((그래서 나는
1 1. 운다 2. 때린다)
(그래서 분에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으아아아아아앙⋯⋯
흐아아앙, 아아아앙⋯
랜, 랜들?
(그는 뒤로 넘어져 양손으로 간신히 상반신만을 받쳐 버티는 상태 그대로다.)
랜들?
한바탕 울고 나니 어쩐지 다시 공허해져 버리고 맙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충만한 느낌이었는데, 어째서 좋은 순간은 이토록 빨리 지나가 버리고 마는 걸까요?
다시 당신은 혼자서 서럽고, 외롭고, 슬프고,
아주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다시 배가 고픕니다. 당신은 여전히 배가 고픕니다.
지금까지 먹은 걸론 전혀 성에도 차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바로 삼키면 당장 부정적인 감각에서 벗어나 행복해질텐데❤
KP:랜들, 선택합니다.
삼키거나 혹은
이성을 차감하거나.
랜들 록스버그:(눈물샘으로 수분이 전부 빠져나가고, 소리를 지르는 데에 모든 심력을 전부 소모해서⋯ 랜들 록스버그는 지금 공허하다.)
(텅 비었다. 서러워, 외롭고, 슬퍼.)
(아주 오래도록, 어쩌면 ⋯ ⋯ ⋯.)
(1 1. 밥이나 먹자 2. 뇌도 맛있어)
(뭘 먹지? 3 1. 너 2. 쟤 3. 냉장고)
배고파, 랜킨.
저녁은 언제 차려줄 생각이야? (곧바로 뒤를 돈다. 냉장고 두 개를 전부 활짝 열고 또 닥치는 대로 입에 집어넣는다.)
(날고기, 잼, 당근, 양배추 가리지 않고.)
케일럽 랜킨:(그는 한참을 멍청하니 앉아 있다가,)
(그러다가 바닥을 엉금엉금 긴다. 그 없을 때의 당신이 그랬듯이.)
(욕조에서 빠져나온 당신이 그랬듯이. 그렇게 가서⋯⋯)
(뒤에서 허리를 끌어당겨 힘주어 안으며 버틴다.) 랜들.
진정.
진정 좀 해봐. 내가,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내가 잘못, 자, 잘못했으니까⋯⋯.
KP:당신은 먹습니다.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다시 모든 것이 한결 나아진 기분입니다.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공허함도 외로움도 다시 조금씩 가시고, 충족감과 함께 포만감이 밀려들어 당신은 나른해집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랜들 록스버그:(랜들은 사과잼을 입에 다 묻히고 랜킨을 돌아본다.)
(지금은 배가 덜 고파서 뭘 더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입을 벌려서 랜킨의 코를 아앙 깨물었다.)
응? 내가⋯⋯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랜들 록스버그:(무시하고 돌은 나는 케일럽을 마주 안는다.)
(그리고 코를, 귀를, 그리고 입술도 잘근잘근 물기 시작한다.)
케일럽 랜킨:내가, (
어떻게든 해볼게. 정말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라고 말하려고 했다.)
(입술이 물려 목소리가 먹힌다. 그가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가 고개를 살짝 뒤로 물린다.) 네가⋯⋯,
나를 정말로 신경 썼으면 했어⋯⋯.
그게 다야. 정말 그게 다란 말이야.
이렇게 될 줄 몰랐어. 화, 화 내지 마.
화난 거지? 짜증나서 이러는 거잖아⋯⋯.
(눈을 똑바로 마주친다.)
왜 그랬어?
케일럽 랜킨:(입안에서 달큰한 사과 냄새가 난다⋯⋯)
그래야⋯⋯ (후회 지랄하네, 회개할 시간에 선악과 두 개 먹어!)
그래야 네가 나를 생각하니까.
랜들 록스버그:지금 네 생각 밖에 안 나긴 해.
먹을게⋯ 이제 없어서.
배고파.
왜 나는 항상 잘못된 선택만 하는 거지?
그래서 먹어치운 이후에도, 어쩐지 속이 홧홧하게 더워지며 따뜻해지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좋은 순간은 짧고 외로운 순간만이 깁니다. 하나일 수 없다는 사실이 당신을 슬프게 합니다.
다시 당신은 혼자서 서럽고, 외롭고, 슬프고,
아주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지금까지 먹은 걸론 전혀 성에도 차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바로 삼키면 당장 부정적인 감각에서 벗어나 행복해질텐데❤
KP:랜들, 선택합니다.
삼키거나 혹은
이성을 차감하거나.
케이 랜킨. 나 배고파.
그리고 혼자서 서러운 것 같아.
외로워. 슬퍼.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먹으면 토하고 싶고, 아니면 자고 싶고.
나 어떻게 해?
해준다며.
어떻게든 해주겠다고 했잖아.
해 줘!
어떻게든 해주란 말이야!!
(그리고 다시 또 울기 시작한다.) 흐아아아앙⋯
전부 다 싫어⋯ ⋯
너도 싫고, 밖에 있는 저 여자애도 싫고, 음식도 싫고, 나도 싫고⋯
살기 싫어⋯
케일럽 랜킨:(처음 알았다. 상대의
살기 싫다는 말이 어떤 무게로 다가오는지.)
(숨을⋯⋯ 쉴 수가 없다. 어지럽다. 사과 냄새가 난다. 울고 있다. 랜들 록스버그가. 소리를 지르고⋯⋯ 팔이 아프다. 별로 세게 깨물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물린 곳마다 열이 올라 화끈거린다. 나는 지금 무슨 표정이지? 울음 소리. 살기 싫어. 소리. 전부 다 싫어. 밖에 있는 저 여자애도 싫고, 음식도 싫고, 나도 싫고⋯⋯ 아. 과수원 냄새. 사과 냄새.)
(사과 냄새가,) 어떻게든 해 볼게.
가만히, 가만히만 있으면, 응? 내, 내가, 뭐든⋯⋯,
(이제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된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랜들. 응? (그는 당신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어 올린다. 황급히 머리─물론, 아직 핏물이 엉겨붙어 엉망이다─를 감싸안은 채, 귓가에 대고 거의 속삭이다시피 말한다.) 내 애칭 기억하잖아.
(그는 현재의 랜들 록스버그가 무엇도 제대로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내지 않을 편지라고 생각하니 비로소 솔직해진다.) 방법을 찾아볼게.
싫어하지 말아줘.
랜들 록스버그:(
싫어하지 말아줘. 그 요구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랜들은 입 안에 달큰하게 남은 사과 향을 곱씹다가⋯ 케일럽 랜킨 입가에 묻은 사과잼을 핥고, 빨았다.)
그럼, 케이⋯.
그럼, 그럼 먹어도 돼?
먹게만 해주면 싫어하지 않을게!
케일럽 랜킨:(입술을 핥고, 빤다. 잠시간 혀가 엉켰다가 떨어진다. 그건 차라리 유아틱한 행위에 가까웠는데도 기이하리만치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 (그는 뒤늦게 자각한다. 자신의 편지가 연서였음을.)
(로맨스는 사람을 홀린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얼마나?
아니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케일럽 랜킨:얼마나 줘야, (혼곤하다. 공포와 사랑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만족해?
내가 없어지면 좋을 것 같아?
(놀랍게도 순수한 질문투에 가까웠다. 그로선 아주 드문 일이다.)
먹어봐야 알 것 같아⋯.
(잘근잘근 거리다가 입술을 꽉 깨문다. 피가 난다⋯.)
먹어도 돼?
케일럽 랜킨:네가⋯⋯, (깨물린 상태라 발음이 샌다.)
나를 생각한다면.
아주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랜들 록스버그:(이젠 진짜 미룰 수 없어⋯
1 1. 먹어치워! 2. 그건 아니야)
(그래서 나는 어떤 예우를 다하듯 그에게 입을 맞췄다. 혀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얼기고 섞어서⋯ 아, 왜 사람들은 진심을 맹세할 때 키스를 하는 걸까?)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거짓말이다. 기억하지 않았는데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준비된 자리에 허리를 펴고 앉았다. 무릎 위에 냅킨을 올려두었다.)
(식기는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사용한다.)
(나눠 먹은 것이 아니니 공용 스푼은 이용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입을 다물고 꼭꼭 씹는다. 말을 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다시 정신을 차렸다고 자각이 들 때쯤엔 이미 시퍼런 주검의 물어뜯긴 팔을 들고 있었다. 이 순간, 다시 한번 내가 깨달은 것은 사람의 신체는 그리 만만하지 않아서 쉽게 뜯어지지 않는다 라는 점이다.)
(그런데 나는 ⋯ 2 1. 아직도 배고프다 2. 이제 괜찮아)
(배가 전부 채워져서, 배고프다는 기분이 잠깐 지워져서⋯)
(⋯⋯⋯.)
외로워.
슬퍼.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혼자라서 너무 서러워⋯
그도 싫고, 밖에 있는 저 여자애도 싫고, 음식도 싫고, 자기 자신도 싫고,
왜 혼자서만 이렇게 슬프고 공허하고 아파야 하죠? 고통이 모든 것을 좀먹습니다.
⋯⋯생각을 해 보면, 아니, 애초에 생각이라는 게 잘 나진 않겠지만.
하여간에, 당신은 아마 아픈 걸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슬픈 것도 싫고 서러운 것도 싫습니다.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죄다 싫습니다.
아무렴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러므로 행복해지는 것이야말로 타고난 권리일진대, 어쩐지 배고픔을 밀어내고 나니 서럽다는 느낌이 들어서.
물어뜯긴 여자의 미처 처리되지 못한 시신 한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