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겨울의 어느 추운 날입니다.
본래의 약속 시각은 오후 여섯 시. 약속 장소는 호텔의 정문.
그러나 현재 시각은 오후 여섯 시 십삼 분, 케일럽─벤야민은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있습니다.
사이 좋은 연인이나 가족 단위의 손님이 당신을 지나쳐 들어서는 순간, 당신의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하는 소리.
도대체 사람이 왜 저 모양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쯤 돌이켜 보자면, 오늘의 데이트─그 단어가 적절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일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호텔에서 체크인. 이후 저녁 식사를 하고 심야 영화를 본 후 돌아오는 간단한 일정.
사이에 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전혀 이야기해 두지 않았습니다만, 이곳은 번화가에 위치한데다 카지노까지 딸린 대형 호텔이니 어떻게든 되겠지요.
애초에 반쯤 의무적으로 가지는 만남이라, 뭐 그다지 대단한 이벤트가 필요할 것도 아니긴 합니다.
KP:케일럽이 도착하기까지 십 분입니다. (아마도요!) 랜들, 그동안 무엇을 해볼까요?
랜들 록스버그:(터치 두 번, 드래그, Kー)
벤야민 비솃:(⋯⋯그리고 나서 오 분 더 걸렸다.) 안 누워 있잖아.
랜들 록스버그:(잡지 읽다가 슥 내린다.) 지각비 내.
오천 파운드.
벤야민 비솃:(주머니 뒤져서 오 펜스 동전 손바닥에 놔 준다.)
⋯⋯그런데 지각해도 괜찮아? 예약했다면서. (지가 늦어 놓고 이런다.)
랜들 록스버그:(오 펜스 던졌다가 휙 잡아챈다.) 괜찮아~. 거기 호텔 VIP 석이라서 치울 일 없어.
벤야민 비솃:그럼 들어가자. 나 추워. (지가 지각해서 랜들 밖에 30분 세워 놓고 하는 소리.)
랜들 록스버그:(개의치 않다.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로.) 다 너 때문이야, 이거.
벤야민 비솃:따지고 보면 버스 때문이지. 이게 왜 나 때문이야? (지 때문 맞다. 따라 들어간다.)
랜들 록스버그:이 호텔, 너 때문에 처음 예약한 거거든.
그 뒤로 자꾸 와서 VIP 됐어~.
벤야민 비솃:그런 날에 오기엔 너무 좋은 호텔이긴 했지.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립니다. 대기하고 있던 벨보이가 둘을 22층의 레스토랑으로 안내합니다.
겨울인지라 해는 이미 떨어졌습니다. 덕분에 창밖으로 런던 시내의 야경이 한눈에 보입니다.
누구 덕분에 예약 시간에 삼십 분 가까이 늦어버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야경이 보이는 창가 자리를 안내받은 것은 순전히 당신이 이곳의 VIP인 덕입니다.
종업원:(빠르게 둘을 자리로 안내한다. 뭔가 엄청난 파인 다이닝 코스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한 후,) 주류는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랜들 록스버그:저거-스파클링-랑 잘 어울리는 와인이요♥
(또 뭔가 주절주절⋯⋯ 설명하다가, 하여간에 랜들 몫의 하우스 레드 와인과 케일럽 몫의 스파클링 와인을 종이에 기재한다.)
⋯⋯네! (누구의 니즈를 맞춘 귀여운 여자애다.) 디저트는 뭘로 하실까요?
랜들 록스버그:(냅킨에 시선을 떨군 채 무언가 쓰고 있다.) 뭘로 할 거야?
벤야민 비솃:(테이블에 턱을 괸다.) 이거. 음⋯⋯ 산딸기 무스요.
랜들 록스버그:치즈 타르트요.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 끼운 냅킨을 앞으로 내민다.)
(종업원이 그걸 받아 들면 손가락으로 수화기 모양을 만들어 귓가에 댄다.) 끝나고 전화해, 미스.
종업원:산딸기⋯⋯ 무스, 치즈 타르⋯⋯, (빠르게 기재하던 그녀가 고개를 든다.)
⋯⋯.
(귀까지 새빨개지는 건 순식간이다.)
(어리고 예쁜 여자애. 기껏해야 스물둘?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냅킨을 받는다.)
벤야민 비솃:(종업원이 사라지는 동안 쓰레기 보듯 랜들 본다.)
종업원:(둘이 아웅다웅하는 동안 다른 종업원이 식전빵을 서빙한다.)
벤야민 비솃:네가 시나트라 씨와 헤어진 지 몇 주 됐는지 계산하고 있었어. (빵을 잘게 찢는다.)
랜들 록스버그:왜? 관심 있으면 연락처 줄까?
랜들 록스버그:(굳이 벤야민이 찢은 빵을 콕 찝어서 가져간다.) 아~ 그러고보니 여자 생겼다고 했나.
벤야민 비솃:(그는 빵을 먹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손장난하듯 찢고만 있다.)
(그러다 고개를 든다. 눈매가 갸름해진다.) ⋯⋯뭐야?
벤야민 비솃:어쩌라고. 정신병원 데려가 주든가. (다시 빵 껍질을 손톱으로 짓이겨 찢기 시작한다.)
랜들 록스버그:데려간다고 했는데, 이력 좆같이 남을 테니까 싫다고 뻗겼잖아?
너 진짜 쓸데없는 것만 일일이 기억하는구나. (손이 멈춘다. 걸레짝이 된 빵을 내려둔다.)
랜들 록스버그:네가 여자 만난다고 나랑 안 놀아줘서, 내가 심심하니까⋯
종업원:(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샐러드를 서빙한다. 희석한 머스터드 소스를 곁들인 니수아즈 샐러드가 자리에 놓인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진다.)
벤야민 비솃:웃기시네. (샐러드를 대충 접시에 던다.)
아. 니수아즈는 별로야. 너 다 먹어. (풀만 조금 덜다가 말았다. 접시 통째로 랜들 쪽으로 밀어 버린다.)
랜들 록스버그:(제 쪽으로 산더미로 밀려오는 샐러드 쳐다보다가 고개 든다.) 너 어린애야?
벤야민 비솃:이 샐러드의 토핑 중 내가 좋아하는 건 올리브랑 앤초비밖에 없어. (풀 깨작깨작⋯⋯)
토마토. 오이. 감자. 참치. 달걀. 왜? 좋은 것만 들었네.
랜들 록스버그:(포크로 한입거리로 찍고 비행기 태우듯-어린 시절에 엄마가 자주 해준- 벤야민 입가에 대준다.) 아아.
벤야민 비솃:(깨작거리다 말고 기함한다.) 야. 야!
치워, 미친. 안 치워?
랜들 록스버그:(입 벌려진 사이에 꾸욱 밀어넣는다.)
(결국 입이 벌어진다. 떨어지기 전에 황급히 받아 먹는다.)
(콩과 달걀 따위를 한참 씹느라 대답이 없다가⋯⋯)
(삼키고 나서,) 죽어라.
벤야민 비솃:한 번만 더 이 짓거리 해 봐. 그대로 네 면상에 뱉을,
종업원:(다음 요리가 서빙된다. 콜리플라워를 곁들인 삼치다. 요리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다시 이어진다.)
(벤야민─케일럽 쪽에는 게살로 속을 채운 도미가 서빙된다. 둘이 선택한 요리들이다.)
(꾸벅 인사한 종업원이 사라진다.)
벤야민 비솃:아. 짜증나. (포크로 쿡, 쿡, 찔러 보기 시작한다. 적당히 작은 조각으로 잘랐다가, 한 입 먹었다가,) ⋯⋯.
⋯⋯내 거랑 바꾸자.
랜들 록스버그:아잇~ 이럴 거면 빅맥을 먹던가, 진짜.
(이번에는 군말없이 한 입도 대지 않은 제 접시와 바꿔준다. 먹어보고 맛있으면 바꿔주기 싫을 테니까⋯.)
너 내가 다 봐주고 있는 거 알아야 해.
벤야민 비솃:(마지막 말엔 굳이 대답 안 한다. 접시를 받아든다. 이쯤 당신이 자각했을 사실 하나, 그는 오늘 들어 단 한 번도 당신에게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소스에서 유자 맛 날 줄은 몰랐단 말이야. (대신 변명을 덧붙인다.)
랜들 록스버그:(랜들 록스버그는 배운 순수혈통의 자제라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몇 가지 깔고 들어가는 젠틀먼의 소양이 있는데, 하나는 필기체고, 다른 하나는 식기로 사람을 공격하면 안 된다는 에티켓이다.)
(아니었으면 손등을 포크로 찔렀을 거다.) 오늘따라 왜 이러지?
심심해? 심심해서 시비거는 건가?
뭐가, 라고 하면 죽여버린다.
벤야민 비솃:⋯⋯왜? (그리고 케일럽 랜킨─지금은 다른 이름을 달고 있으나, 하여간에─은 평범한 머글 집안의 자제라서, 굳이 의식하지 않으면 수행하지 못하는 젠틀먼의 소양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식기를 소리 내서 내려놓지 않는 것이다.)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둔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울린다.) 내가 무슨 시비를 걸었는데.
랜들 록스버그:(크나큰 한숨, 들으라는 듯이.)
됐다, 밥이나 먹자.
벤야민 비솃:내가 뭐 했냐고? (요리가 식어가고 있다.)
종업원:(그러거나 말거나 코스는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상황에 익숙할 종업원이 파스타 요리를 내온다.)
(수란, 라구와 랍스터를 곁들인 파스타가 둘의 가운데 놓인다. 종업원이 고개를 숙인다.)
벤야민 비솃:(그는 집게를 들지 않는다.) 내가 뭐 했냐고.
랜들 록스버그:스스로 성찰해 봐. (다소 성의 없는 대답을 내놓고는 파스타를 돌돌 말기 시작한다.)
벤야민 비솃:(녹색 시선이 당신을 노려본다. 당신의 것과 꼭 같은 색이고, 그래서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파스타엔 손도 대지 않는다. 한참 그러다가 다 식은 생선이나 뒤늦게 입에 넣기 시작한다.)
(포크 아래로 살이 으깨진다.)
종업원:(둘이 한 마디도 없이 식사를 이어 가는 동안 메인 디쉬가 서빙된다. 뼈를 제거한 양고기 등심이 랜들의 쪽에,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메로구이가 벤야민의 쪽에 놓인다.)
벤야민 비솃:(뭉툭한 나이프가 이번에도 생선의 살을 으깬다. 먹을 생각이 있긴 한 건지, 포크는 들지도 않는다.)
랜들 록스버그:너 물고기 괴롭히려고 시킨 거야?
벤야민 비솃:너 닮아서. (고개는 들지도 않고 대꾸한다.)
벤야민 비솃:멍청하잖아. (메로가 네 등분, 여덟 등분⋯⋯)
랜들 록스버그:너 나 싫어해? (몇 년 전부터 같은 레퍼토리의 질문이 반복된다.)
벤야민 비솃:밥이나 처먹어. 네 접시에 올라간 양이 불쌍하지도 않아? (몇 년 전부터 같은 레퍼토리의 대답이 반복된다.)
랜들 록스버그:먹기 싫으면 내 양고기랑 바꿔줄게.
심심해서 시비 거는 거냐면서.
그래서 입 다물어 줬더니, 이젠 왜 네가 시비야? (⋯⋯열 등분. 거의 박살이 난 메로 살을 그가 입에 넣는다. 마침내.)
랜들 록스버그:그래, 네가 오늘 하루종일 심통이 나 있으니까.
그래서 기분을 물어봐주고 있잖아. 오늘 뭐 끔찍한 일이라도 있었냐고.
늦어서 기다려주고, 먹기 싫다는 거 다 바꿔줬는데⋯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모르겠어. 그럼 하나지.
내가 싫어?
벤야민 비솃:⋯⋯늦을 생각 없었어. (딴소리.) 아까⋯⋯,
⋯⋯.
아. 짜증나. 밥 먹어. (시선을 접시에 처박는다.)
크리스마스 얼마 안 남았어.
벤야민 비솃:좋은 날? (으스러진 메로 살을 포크로 쿡, 쿡, 찌른다. 죄다 박살을 내 놓은 탓에 찍히지 않았다.)
랜들 록스버그:(이후로는 쭉 말이 없다. 이런 침묵이 어색하기엔 우린 너무 오래 알고 지냈고. 벤야민 비솃은 모르겠지만, 랜들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뒤이어 온 디저트 접시 중 제 몫을 가져간다. 치즈 타르트 위 초콜릿 장식을 산딸기 무스 위에 올려준다.)
좋은 날.
벤야민 비솃:(랜들이 와인 잔을 거의 다 비웠을 동안 그는 절반도 채 마시지 않은 채였다.)
(초콜릿 장식이 그의 접시 위에 놓였을 때, 그는 마침 잔을 비워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고, 그래서 오른손엔 포크 대신에 목이 긴 유리잔을 들고 있었다.)
(덕분에 반응이 뒤늦다.) ⋯⋯.
(대답 대신에 잔을 기울인다. 투명한 황금빛 액체가 넘어간다.)
(뒤늦게,) 안 어울려.
랜들 록스버그:이제부터 앙탈이라고 생각해야지.
(거의 다 비운 잔을 내린다.) 입맛 떨어져⋯⋯.
랜들 록스버그:(와중에 깔끔하게 자른 치즈 케이크를 거의 다 먹어가던 참이었다.) 넌 매번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불평만 하더라.
벤야민 비솃:(그는 무스를 조금 잘라 먹고선 말았다. 디저트 스푼을 결국엔 내려 둔다.)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게 아냐.
넌 그냥 어떻게 해주기 싫은 거야. (뒤늦게 다시 스푼을 든다.)
(얇고 작은 초콜릿을 입에 넣는다.)
랜들 록스버그:내가 여기서 더 잘했으면 좋겠어? (본인의 접시를 치워두고 딸기 무스를 작게 잘라 집어간다.)
벤야민 비솃:들어나 보자.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는지. (스푼을 정말로 내려 둔다. 잔은 완전히 비었다.)
랜들 록스버그:잘 모르겠는데 네가 더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길래. ("다 먹었어?" 손 위에서 포크 굴린다.)
벤야민 비솃:넌 더 잘할 수 있어. (고개를 까딱인다.) 이 호텔의⋯⋯
무슨 점을 네가 좋아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봤는데.
아마도 카지노야. 맞지?
랜들 록스버그:(아예 자신이 그 접시를 가져가서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아닌데.
물론 싫어하진 않아. 적당히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해.
음⋯ 다 먹었으면 슬슬 일어날까?
벤야민 비솃:(그러면? 하고 되묻진 않는다. 입가를 닦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영화 열한 시 거야.
시간 떠. 뭐 할 거야?
벤야민 비솃:아니라더니. 씨발. (냅킨을 곱게 접어 내려 둔다.) 게임도 하려고?
랜들 록스버그:호텔의 좋아하는 점이 아니라고 했지, 카지노가 싫다고는 안 했는데?
벤야민 비솃:말꼬리 잡지 마. (고개를 까딱인다.)
KP:마침 VIP를 안내하는 벨보이가 근처에 있던 참입니다.
그의 안내를 받아 바로 카지노로 이동할 수 있겠습니다. 이동할까요?
랜들 록스버그:가자, 그럼. 내가 돈 빌려줄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벤야민 비솃:아니, 안 할 거야. 구경만 할 거란 말이야.
(일단 쫓아가긴 한다.)
앳된 인상의 벨보이가 둘을 카지노로 안내합니다.
사방에서 터지는 금빛 샴페인 거품. 숨넘어가는 웃음 소리.
멀끔한 낯의 딜러가 칩을 쌓고, 쌓고, 또 쌓아서 산을 만드는 동안, 단 일 초만에 테이블 위에선 희비와 만감이 교차합니다.
슬롯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룰렛이 돌아가는 소리. 공을 튕기는 소리와 비명과 탄성과 기쁨의 신음.
정신없고, 요란하며, 그래서 시간을 죽이기엔 딱인 곳.
블랙잭 테이블은 안쪽입니다. 바로 갈까요?
잃어도 괜찮은데. (일단 벤야민을 끌고 데리고 들어간다.) 안 할 거면 옆에 앉아라도 있어.
벤야민 비솃:안 할⋯⋯, (그대로 끌려 들어간다.)
(얼결에 앉기까지 한다. 웃는 낯의 딜러가 카드를 섞는 동안 랜들만 노려본다.) 안 한다고.
딜러:(그러거나 말거나다.) 반갑습니다. 저희 테이블에선 네 벌의 덱을 사용합니다. (눈웃음~) 참여하시겠어요?
랜들 록스버그:오천 파운드 어치 칩. 오십 개. 아까 네가 나한테 준 오 센트야. (그리고,) 네에.
얘도 한대요. 전 다섯 개.
벤야민 비솃:오천 파운, (말허리가 잘린다.) 뭐?
잠깐, 전 안 하─⋯⋯
KP:현금을 받은 딜러가 오십 개의 칩을 당신들에게 건넵니다.
배팅이 완료되고 카드가 분배됩니다. 발 빼기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벤야민 비솃:이런 씨⋯⋯, (손 앞에 카드가 놓인다.) ⋯⋯전 한 개만요.
넌 이거 끝나고 보자. 이 새끼야. (⋯⋯카드를 뒤집는다.)
들어온 카드는 4과 19.
19 쪽이 랜들입니다.
옆 테이블에서 탄식이 들려옵니다. "카운팅은 충분히 하고 시작했는데, 이번에도 글렀어."
반면에 랜들, 이 테이블의 당신은 가만히만 있어도 먹겠네요! 운이 좋은 날입니다.
딜러:(딜러의 오픈 카드는 7. 그가 웃으며 랜들을 바라본다.) 더 받으시겠어요?
벤야민 비솃:(카드를 노려보고만⋯⋯ 있다.) 아. 씨.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린다.) 짜증나.
(그러고선 새 카드를 뒤집는다. 새 카드는 6.)
⋯⋯스테이. (손을 가볍게 흔든다.)
딜러:(그녀가 자신의 카드를 뒤집는다. 카드는 7과
5.)
12네요. 히트입니다. (새 카드를 뒤집는다: 10.)
아, 이런. (살며시 웃는다. 7, 5, 10, 합계 22의 버스트.)
벤야민 비솃:⋯⋯에이스 11, 3, 거기에 6. 합계 20.
넌 19지. 내가 더 높아⋯⋯.
뻗대더니 너도 사실 좀 하고 싶었지?
벤야민 비솃:아니야. (쌓이는 칩을 물끄러미 들여다만 본다.) 한 판만 더 할 거야.
랜들 록스버그:(1백 파운드짜리 칩 5개 내밀었다.)
딜러:(칩이 쌓인다. 딜러가 새 카드를 배분한다.)
KP:카드를 뒤집습니다. 들어온 카드는
17과
18.
17 쪽이 랜들입니다.
벤야민 비솃:스테이. (결정은 빠르다. 망설임도 없다.)
랜들 록스버그:저는 히트요~. 잘 봐주세요, 누나.
딜러:(딜러의 오픈 카드는
1이다. 그는 웃으며 랜들에게 고개를 까딱인다.)
딜러:좋습니다. 저는 스테이요. (랜들에게 새 카드가 간다. 카드는
8.)
어머, 버스트네요.
에이스 11, 8. 합계 19입니다.
(칩 여덟 개가 딜러 쪽으로 사라진다.) 더 하시겠어요?
인생은 삼세판이죠. 한 번 더 해주세요. (대답도 안 듣고 열 개 밀었다.)
벤야민 비솃:(그는 첫 판에 고작 칩 한 개를 걸었던 탓에, 첫 판을 이겼음에도 정작 이백 파운드를 잃은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안 한,
야!
KP:딜러가 웃습니다. 새 카드가 분배됩니다.
들어온 카드는 5과 12.
12 쪽이 랜들입니다.
어쩔까요? (포커 페이스의 귀재다.)
벤야민 비솃:(이젠 말도 안 한다. 그는 검지로 테이블만 두드린다.)
랜들 록스버그:(그 옆에서 능청스럽게,) 당연히 히트죠!
딜러:(둘에게 새 카드를 한 장씩 분배한다.) 즐기시고 계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검지로 테이블을 한번 더 두드린다.) 왜 이래?
한 장 더 주세요~.
딜러:이번 판이 마지막이라니 아쉽네요! 매력적인 게이머 분들이신데요. (새 카드가 분배된다.)
아~ 오늘은 잘 안 풀리네.
벤야민 비솃:(17에서 히트 했다고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이젠 그의 카드도 17이었다.) ⋯⋯.
⋯⋯스테이.
2와 4. 히트해야겠네요. (새 카드를 또 뽑는다. 4.)
(말 없이 다시 새 카드. 3.)
(유리처럼 깔끔한 낯으로, 다시 새 카드. 3.)
(마지막 카드를 뒤집으며 손을 놓는다. 7.)
23. 아깝게도 버스트입니다.
(벤야민의 쪽으로 칩이 밀려 간다.) 운이 좋으셨네요!
벤야민 비솃:(얼떨결에 눈앞에 스물몇 개의 칩이 들어온다. 그가 멍청한 표정으로 랜들을 바라보다가,) 일어날래.
더 할 거 아니지?
벤야민 비솃:네 돈이잖아. (몽땅 랜들 쪽으로 밀어 준다.)
랜들 록스버그:지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는데? (필요없다는 듯이 양손 주머니에 넣고 일어난다. 슬롯머신 쪽으로 쫄랑쫄랑 가버렸다.)
(결국 그가 수많은 칩을 모조리 든 채 따라가는 꼴이 되어 버렸다.) 아, 이 새끼.
이게 마지막이야. 영화 봐야 할 거 아냐!
KP:슬롯머신입니다.
행운 판정에 세 번 성공하면 잭팟입니다.
랜들 록스버그:네에, 네. (케일럽 주고 남은 칩 미련 없이 전부 밀어 넣는다.)
벤야민 비솃:야. 너 뭐 하는, (칩이 잘그랑. 잘그랑. 잘그랑⋯⋯)
미쳤어?
KP:얼마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돈이 레버 한 번에 날아갑니다.
체리와 오렌지와 레몬이 당신을 비웃듯 반짝반짝 빛납니다.
벤야민 비솃:일어나, 미친! (짜증스럽게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랜들 록스버그:에이, 텄다. (질질 끌려가며 일어섰다.)
벤야민 비솃:(드물게도 그가 랜들을 끌고 가는 모양이 된다. 아주 아니꼬운 표정으로 칩을 재환전한 후, 지폐를 몽땅 랜들의 코트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나와. 영화관까진 걸어야 해.
랜들 록스버그:어? 돌려줄 필요 없는데. (평범한 근로자의 한 달치 봉급이 주머니 속에 처박고, 그 옆을 느긋하게 걷기 시작한다.)
벤야민 비솃:나야말로 필요 없어⋯⋯ 누굴 거지 새끼로 봐. (그러나, 당연하게도, 방금 랜들 록스버그의 코트 주머니에 쑤셔박힌 지폐는
평범한 근로자인 그의 한 달치 봉급을 아득히 상회한다.)
두 번 다시 너랑 카지노 안 갈 거야. (로비로 나서자 찬바람이 얼굴에 들이닥친다.)
랜들 록스버그:왜? 따서 기분 좋을 줄 알았는데. (아, 바람. 앞머리를 정리하며 걸었다. 영화관으로.)
뭐 예매했어?
벤야민 비솃:안 좋아. 좋겠냐? 내 돈도 아닌데. (케일럽 랜킨은 살아가며 머리가 길었던 적이 별로 없었으므로, 벤야민 비솃의 모습을 한 현재 자신의 뒷머리를 자꾸만 매만진다.)
대만 영화⋯⋯ 제목은 가 보면 알아.
보고 싶었는데, 상영하는 곳이 얼마 없었어. 마이너한 영화도 틀어 주는 영화관이 근처에 있다는 게 이 호텔의 몇 안 되는 장점이지.
KP: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영화관.
그제야 당신은 케일럽이 예매한 영화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비밀不能說的秘密」.
주걸륜이라는 대만 감독이 만들고 배우로 참여했다는 로맨스 영화입니다.
말마따나 마이너한지, 영화관 안에서도 가장 작은 단 하나의 상영관에서만 상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 팝콘 먹⋯⋯, (깜빡. 깜빡.) 아.
핸드폰. 씨발.
카지노에 두고 왔나 봐.
랜들 록스버그:응? 영화 시작 얼마나 남았더라.
벤야민 비솃:(전광판 쪽에 시선을 한 번, 다시 지금 시간을 한 번. 한숨 한 번.) 얼마 안 남았어.
어쩐지 운이 좋더라니. 이럴 줄 알았지. ⋯⋯.
랜들 록스버그:기다려, 카지노에 전화해 줄게. 끝날 때 찾으러 가. (곧장 담당 딜러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KP:전화를 받은 이가 산뜻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분실물 센터로의 등록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벤야민 비솃:(그럴 동안 멀뚱멀뚱 서 있다. 아주 오묘한 표정을 하고.)
(전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팝콘.
스트레스 받아서 단 거 먹어야겠어.
랜들 록스버그:너무 풀 죽지 마. (말하는 사이에 카드 매점 직원에게 넘겼다. 캐러멜, 오리지널로 반반. 음료는 핫초콜릿이랑 아메리카노요.)
어차피 너 전화올 곳도 없어서 휴대폰 시계로 쓰잖아? (^_^)
벤야민 비솃:아니, 그거랑 이건 다른⋯⋯ ("
주문번호 329번 손님, 음료와 팝콘 나왔습니다." 시선을 돌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팝콘과 음료를 몽땅 들고 돌아온다.)
(이번에도 고맙다는 말은 안 한다.) 핫초콜릿이라니.
가끔 네가 미친놈 같애.
단 거 먹고 싶다고 해서 단 거 줬잖아.
벤야민 비솃:그렇다 해서 누가 핫초콜릿을 시켜?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메리카노와 바꾸자고 하진 않는 게, 평소의 그와 꼭 같다.)
입장해야 해.
랜들 록스버그:왜 이걸로 골랐어? (티켓을 직원에게 내밀고 입장한다.)
그리고 심야에 보려면 로맨스잖아. (그는 앞서 걷는다. 그래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상영관 작네⋯⋯
랜들 록스버그:음~ 그렇구나. 나 바 개업하기 전에 대만 한 번 가자. (정해진 지정석을 찾아 앉는다.)
너는 대체로 미친놈 같고 가끔 제정신 같애. (자리에 파고들듯 한다.)
좋아하는 것도 없으면서 대만엘 왜 가?
랜들 록스버그:칭찬 정말 고마워. (그 옆에 코트를 벗고 놔둔다.) 네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벤야민 비솃:너 진짜 짜증 난다. (그는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빛이 번쩍거렸고, 덕분에 낯이 여러 색으로 물든다. 그는 옆을 돌아보지 않는다.) 진짜⋯⋯
(돌아보지 않는다.) 짜증 나.
101분 사양, 피아노를 치는 남학생과 여학생.
엇갈리는 세계. 운명. 소리. 많은 것들이 부서지고 재건됩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할지라도 不管我们会不会见面,
혹은 네가 나를 잊게 된다 하더라도 不管你会不会忘了我.
네게 한 가지 비밀만큼은 꼭 전하고 싶어 我只想告诉你一个秘密.
이 상영관은 아주 작아서, 둘을 제외하곤 관객도 그다지 없었습니다.
크레딧이 올라갑니다. 관의 불이 켜지며 밝아집니다.
(팝콘은 반도 안 먹었고, 보아하니 핫초콜릿만 조금 먹었다.)
(손으로 눈가를 꾹꾹 짓누른다. ⋯⋯부었다.) 피곤해서 이래.
랜들 록스버그:오, 잘 만들었네. 재밌었다. (상투적이지만 무성의한 말은 아니다. 느낌 감상 그대로 읊으며 자신의 코트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아무 말 없이 코트에서 휴지를 꺼내 그 옆으로 내밀었다. 다 먹은 팝콘통을 겹쳐서 치운다.)
벤야민 비솃:(돌아보지 않는다. 휴지만 집어든다.) 짜증 나⋯⋯.
(꾹. 꾹. 눈꼬리를 누르는 동안 한참 말이 없다. 코맹맹이 소리가 난다.) 다른 거 볼 걸.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대답도 안 하고 먼저 성큼성큼 가버린다.)
케일, 벤야민 같이 가~! (나머지 짐을 모두 자기가 챙긴 채 뒤따라간다. 뭘 잘못 말한 거지?)
KP:그렇게 성큼성큼 걸어나간 그를 쫓아 이동하던 와중, 당신의 옆을 지나치던 퉁퉁 부은 눈의 커플.
그대로 당신에게 부딪칩니다.
다 마시지 못한 콜라가 그만 당신의 옷자락에 튑니다.
연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고개를 숙인 그들은 화장실로 사라집니다.
벤야민 비솃:(나서서 기다리고 있던 그는 삐딱하게,) 저걸 그냥 보내?
랜들 록스버그:아, 아잇~⋯ 옷 다 버렸네. (셔츠를 잡고 잡아당겨 오염된 범위를 살핀다.)
벤야민 비솃:(빛 아래다. 눈가가 벌겋고 선명하게 일었다.) 세탁비 정도는 받아라. 멍청아.
랜들 록스버그:아저씨, 이런 옷은 세탁비가 더 들어요.
한 시면 백화점도 닫았겠네. 그냥 들어가자. 클리닝 좀 맡기고 내일 한 벌 더 사면 돼.
벤야민 비솃:좋겠네. 인생이 여유롭고 잘 풀려서.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까딱인다.) 좋겠어⋯⋯
랜들 록스버그:(슬슬 듣는 체도 안 하고 웃었다.) 들어가자. 나 피곤해.
벤야민 비솃:그러시겠지. 바른 생활 하시니까. (휴지 뭉치를 쓰레기통에 던진다. 가볍게 들어간다.)
그렇게 한바탕 실랑이가 있은 후, 마침내 둘이 다시 밖으로 나서던 차.
(누군가 랜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안녕하세요.
「말할 수 없는 비밀」 관람하셨을까요?
⋯ ⋯응? 어? 저요?
랜들 록스버그:네, 방금 심야로 보고 나왔는데, 무슨 일이세요?
관람 이벤트로 증정품을 제공하고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투명한 비밀로 포장된 하트 모양 목걸이를 쥐여 준다.)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KP:대놓고 수상한 아티팩트를 쥐여준 남자는 뭐라 대꾸하지도 않고, 허겁지겁 뛰어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둘은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아티팩트만 쥔 채⋯⋯
랜들, 뛰어간 남자에게 관찰 판정이 가능합니다. 혹은 목걸이를 살필 수도 있겠습니다.
(뛰어간 남자를 바라본다.)
KP:그가
증정품을 제공하는 영화관 직원일 리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게, 일단 사복 차림이었는걸요?
게다가 영화관 바깥으로 뛰어나가 사라지는 직원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벤야민 비솃:(옆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같이 보고 있었다.) 뭐야?
⋯⋯너 뭐 받은 거야? 마리화나, 그런 거 아냐?
랜들 록스버그:(그 말에 일단 목걸이를 코에 처박아서 냄새를 맡아본다.) 아무 향도 안 나는데.
가루류면 어떡하려고 그걸 냅다 코에 갖다대, 미친 새끼야! (황급히 손에서 채 간다.)
KP:다행스럽게도 랜들에게 별다른 일이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케일럽─벤야민의 손에서 반짝이는 목걸이는 은으로 되었습니다.
스와로브스키 계열의 투명한 크리스탈 펜던트가 달려 있고, 무척 차갑습니다.
하나는 나뭇잎 같은 녹색 하트, 다른 하나는 비 오기 직전 하늘 같은 푸른색 하트.
둘의 눈동자 색을 꼭 닮은 두 목걸이는 ‘사은품’ 따위로 나누어 주기엔 지나치게 고급품처럼 보입니다.
랜들 록스버그:별 거 없네. 그냥 진짜 증정품이었나 봐.
누가 이런 걸 증정품으로 줘?
랜들 록스버그:갑자기 옛날 생각난다. 예전에 나 쫓아다니던 귀여운 여자애가 팔찌에 바늘 끼워서 줬는데.
바늘에 뭐 묻어 있었는데?
랜들 록스버그:아무것도? 줄팔찌라서 손목에 감았더니 튀어나와서 그때 피 좀 봤어.
벤야민 비솃:뭐야, 진짜 그냥 피 내려고 바늘을 끼워서 준 거야?
웃기는 여자애네. (깜빡. 깜빡. 목걸이를 돌려 가며 살피다가 그만둔다.)
찜찜하게⋯⋯.
(하나 가져가서 포장을 깐다.) 뒤 돌아봐.
(대답하는 대신에 옷자락 잡아챈다.) 가자. 빨리. 피곤해.
랜들 록스버그:나 남자 스토커는 없으니까 괜찮, (다 맺지 못하고 그대로 질질 호텔로 돌아간다.)
KP:그렇게 질질 끌려서 호텔로 돌아가던 차, 랜들!
행운 판정.
순식간입니다. 손에서 미끄러진 목걸이가 그대로 추락합니다.
푸른 색의 펜던트가 아스팔트에 갈려 박살납니다.
벤야민 비솃:(날카로운 소리에 뒤를 돌았다.) ⋯⋯.
잘 한다. 잘 해.
벤야민 비솃:뭘 어떡해? 찜찜했는데 잘 됐지.
그냥 가자. 미화원이 치울 거야.
랜들 록스버그:하아, 악세사리 고민하고 있었단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별 고민없이 벤야민을 뒤따랐다.)
벤야민 비솃:웃기시네. 저런 펜던트 안 하는 거 알아. (성큼성큼 이끌고 호텔로 들어선다. 거리낌 없다.)
KP:그렇게 돌아옵니다. 기나긴 하루가 지나갑니다.
그 이후엔 어떤 이벤트도 없었습니다.
둘은 늦게 방에 들어섰고, 각자의 침대에 엎어져 꾸벅꾸벅 졸았고, 누가 먼저 씻을지를 가지고 사소한 실랑이를 벌이다가 말았습니다.
마침내 둘 모두가 씻고 잠들 준비를 마쳤을 때엔 거의 새벽 세 시였습니다.
시간은 늦었고 몸은 피로합니다. 하필이면 날도 추웠던 탓에 대미지만 가중됩니다.
덕분에 둘은 금세 조용해졌고⋯⋯
조식을 먹기엔 이미 늦었고, 그렇다 해서 아예 생활 패턴을 뒤바꾸기에도 참 애매한 시간입니다.
이곳은 당신들의 호텔 방이고, 레이트 체크아웃을 신청했으니 시간은 넉넉합니다만⋯⋯ 은.
KP:랜들, 현재 시각은 오전 10시입니다. 무엇을 할까요?
랜들 록스버그:(으음⋯ 음. 눈가를 비비고⋯ 케일럽을 쳐다본다.)
너 조식 안 먹을 거야?
케일럽 랜킨:(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잠들어 있다.)
랜들 록스버그:(그의 자리로 가서 케일럽을 흔들어본다.) 케-일-럽.
조식 먹을 거냐고, 아니면 나 혼자 시킬 거야.
케일럽 랜킨:(대답하지 않는다. 흔드는 대로 머리가 흔들린다.)
(솜이 빠진 인형 같다. 목이 반쯤 꺾인다.)
(인중에 검지 손가락 대본다.) 케일럽?
케일럽 랜킨:(호흡하고는 있다. 아주 미약하게.)
(그러나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대답이 없다.)
⋯ ⋯ ⋯.
(뺨을 철썩 소리 나게 내려친다.)
케일럽 랜킨:(고개가 세차게 돌아간다. 그는 깨어나지 않는다.)
(조건반사적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고개를 기울여 심장 부근에 가까이 댄다.)
케일럽 랜킨:(고작 한 겹짜리 가운에 먹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심장은 아주 느리고 작게 뛴다.)
당신이 그렇게 실랑이하는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
랜들 록스버그:뭐야⋯? (일단 살아있는 것 같으니 두고 문을 열러 간다.)
정장 차림의 여자:(문앞엔 머리를 깔끔하게 올려 묶은 여자가 있다.)
(정장 차림이나 호텔의 종업원처럼 보이진 않는다.) 안녕하세요.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뭐하시는 분이세요?
호텔 관계자는 아닌 것 같은데.
(그제야 허둥거리며 인사한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앞서서 그만 소개도 안 드렸네요.
저는⋯⋯,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맨 인 블랙이라고 하면 알아들으실까요?
비슷한 사람입니다. 그, 너무 자세힌 알려 들지 마시고⋯⋯.
⋯⋯오늘 새벽에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셨을 텐데요.
랜들 록스버그:오늘 새벽엔 잠만 자서⋯ 아, 혹시,
그 증정품 때문인가? 목걸이요?
정장 차림의 여자:(목걸이, 소리에 눈매가 갸름해진다.) 맞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받은 물건이지요?
랜들 록스버그:네⋯ 둘 중 하나는 깨져서 버리긴 했는데요.
⋯ ⋯ 뭐 잘못된 건가요?
정장 차림의 여자:그럴 테지요. 그래서 한 분만
지금 깨어 계시는 것일 테고요.
불행 중 다행이네요. 제가 호텔의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고개를 까딱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초대를 좀 해주시겠어요?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요.
랜들 록스버그:네? 네⋯ (지금 깨어있다고?)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정장 차림의 여자:(그러자 그녀는 곧장 안으로 들어선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 잠들어 있는 케일럽 랜킨의 곁으로 향하더니만, 침대를 서둘러 훑기 시작한다.) ⋯⋯.
⋯⋯찾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렸을 때.)
(그녀의 손엔 녹색 펜던트가 달랑거리는 목걸이가 들려 있다.)
각설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목걸이는 사교도의 것이에요.
랜들 록스버그:(랜들은 이 와중에도
거봐, 마약은 아니잖아.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요?
이게 왜 영화관람객인 저희 손에 들어오게 된 거죠? 제 친구가 못 깨어나는 이유와도 연관이 있나요?
정장 차림의 여자:⋯⋯여러분의 손에 들어간 것은 아마도, (깜빡.) 그저⋯⋯ 불운입니다.
그리고 못 깨어나는 건, (이 즈음 목을 한 번 가다듬는다.) 이 목걸이에 걸린 주술 때문이에요.
이 목걸이는 본래 이계의 신을 추앙하는 사교도의 것입니다. ("이혼, 진학 실패, 실연 따위의 사소한 불운. 뭐 그런 것들에서의 현실 도피를 위해 사교술에 빠져든 작자로 추정됩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죠." 덧붙인다.)
정장 차림의 여자:그는 이 목걸이에
이면세계를 만드는 주술을 걸어 두었는데, 그게 불운하게도 여러분의 손에 들어와 버린 것이고요.
주술을 사용한 흔적을 발견하자마자 쫓아왔습니다만, (시선이 내려간다. 붉은 머리카락.) 이미 늦었네요.
뭐가요? 케일럽 랜킨이?
⋯ ⋯ 살아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숨은 쉬고 있는데?
정장 차림의 여자:아. 물론 살아는 있습니다만.
(깜빡.) 우선 설명을 마저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체인질링 하트Changeling Heart라고 부르는 이 목걸이는, (손에서 펜던트가 달랑거린다.) 이 하트 사이로 투과한 대상을 이면세계로 전송시킵니다.
그 이면세계는 주술 대상의 무의식을 반영하여 창조되는 가상의식세계인데, 그곳에선 모든 것이 대상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좋아하는 것. 바라는 것. 원하는 것. 어렴풋하게 생각한 모든 게 이면세계에서 구현되고, 그래서 주술에 걸린 사람은 나오지 못하게 되죠.
이면세계가 완성되기까진 스물네 시간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스물네 시간은 살아 계실 겁니다.
(그리고 눈을 두어 번 더 깜빡였다가⋯⋯) 그런데요.
이거, 지금 누워 계신 이 분의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요?
(시선은 당신의 녹색 눈에 향해 있다.) 하나 깨졌다는 게 혹시, 이분의 눈동자 색과 같았나요?
랜들 록스버그:아, 네? 네⋯ 파란색이었습니다.
저희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어떡하시겠어요?
랜들 록스버그:어떻게 하긴요. 데리고 나와야겠죠?
만에 하나 거기서 살고 싶다고 해도⋯ ⋯ 들어가서 말은 해봐야겠죠. 그 애는 진짜만 좋아하니까요.
그리고 나름 저한텐 중요한 사람이기도 해요.
어떻게 들어가는데요?
정장 차림의 여자:대답은 들었습니다. (깜빡.) 보내 드리는 건 제가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24시간입니다.
그 안에 당신께선, (손에서 목걸이가 달랑거린다.) 이것과 동일한 하트.
즉 세계의 핵을 찾아서 함께 돌아오셔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어요?
랜들 록스버그:뭐어⋯ 어딘가에 있겠죠. 어차피 케일럽 랜킨이 만든 세계라고 했잖아요?
단순한 사람이라 괜찮을 거예요.
알기 쉬워서⋯.
⋯ ⋯ ⋯.
누울까요?
정장 차림의 여자:정말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한숨 푹.) 네, 그렇다면 누워 주시고.
이건 정말 중요한 건데, (누운 당신을 그녀가 내려다본다. 역광이 진다.) 그 세계 안의 저 분께.
절대로 지금 있는 곳이 이면세계라는 것을 들켜선 안 됩니다.
그곳은 무의식을 기반으로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세계인 터라, 들키면 세상이 무너져요.
그럼 함께 갇히실 거예요.
여기까지 알아들으셨나요?
오케이, 이해했어요.
(그리고는 슬리퍼를 벗어 케일럽 바로 옆에 누웠다.)
정장 차림의 여자:⋯⋯행운을 빕니다. (어쩐지 자신 없는 말투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길.
난생 처음 들어 보는,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주문이 그녀의 입에서 나와 읊어지는 것을 듣고 있자면.
마취주사를 맞은 듯 천천히 몸에 힘이 빠지고 의식이 흐려집니다.
정장 차림의 여자:아, 잠깐. (그녀는 당혹한 목소리로,)
설명하기를 깜빡한 게 있는데─
KP:랜들.
이면세계 속에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케일럽의 이면세계가 완성되기까지의 24시간 내로 그를 구해서 현실로 돌아와야 합니다.
둘. 돌아오기 위해서 당신은 어딘가에 있을 “목걸이와 똑같이 생긴 하트”를 찾아내야 합니다.
셋. 그 과정에서, 절대로 케일럽에게 그곳이 가짜 세계라는 것을 들켜선 안 됩니다.
⋯⋯어쩐지 그다지 춥다고 느껴지지 않는 겨울의 어느 날입니다.
본래의 약속 시각은 오후 세 시. 약속 장소는 호텔 근처의 한 카페.
현재 시각은 오후 두 시 오십 분, 케일럽─벤야민은 이번에도 늦을까요?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연인이 당신을 지나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툭 하고 어깨를 건드립니다.
오, 이번엔 안 늦었군요. 완전한 세계라더니 지각도 없는 모양입니다.
─따위의 감상과 함께 고개를 돌리면, 그래서 눈이,
아마 당신은 그 얼굴을 평생 보아 왔을 겁니다.
그러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야, 보통, 자신의 얼굴은 거울에서나 보잖아요? 눈앞에서 살아 숨쉬는 자신의 얼굴을 보지는 않잖아요?
(당신이다.) 랜킨?
KP:랜들, 지금부터 당신은
케일럽의 취향, 결핍, 트라우마, 무의식 등의 모든 요소가 천천히 반영되고 있는 가상의식세계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이곳은 ‘그가 상처받지 않는 완벽한 세계'이므로, 개연성이나 핍진성과 관계없이 모든 일이 손쉽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케일럽의 목걸이와 랜들의 목걸이가 바뀌어 버린 탓에, 케일럽은 현재 랜들의 몸에 들어가 있습니다.
여자가 마지막에 황급히 외쳤던 말이 희미하게 머릿속을 맴돕니다.
정장 차림의 여자:아티팩트가 바뀌어서, 지금 이 분께선 본인이 당신이라고 착각하고 계실 거예요.
본인이 둘이면 이상하니까 일단 비어 있는 이 분의 몸에 넣어드릴게요!
랜들은 케일럽을, 케일럽은 랜들을 연기합니다.
물론 랜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요. 케일럽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캐해 배틀을 힘내봅시다!
주: 연기가 허접하면 안 됩니다. 케일럽이 의심하면 세계가 무너집니다.
랜들이 이곳이 가상세계라는 여지를 줄 만한 행동을 하거나 위화감이 들 만한 말을 할 때마다 1D15점의 위화감 점수가 누적됩니다. 일정 점수에 도달할 때마다 상응하는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랜들 록스버그─C:(눈앞에 대고 핑거스냅.
딱!) 무슨 생각 해?
(와~~ 진짜 실화?)
(와, 진짜 진심으로?)
케일럽 랜킨─R:(미간을 몇 번 누른다.) 머리 아파.
너 때문에.
언제까지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을 거야?
카페 안에⋯⋯ (흘끔.) 오. 자리 없다.
케일럽 랜킨─R:나 지금 머리 빠질 것 같아서 묻는 건데. 오늘 뭐 하기로 했더라? (카페 안쪽의 자리를 탐색한다.) 브리핑 좀 해봐.
랜들 록스버그─C:오늘? 별 거 없는데. (그는 그다지⋯⋯ 당신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손가락을 꼽아 가면서,) 시간이 뜨니까.
카페에서 시간 좀 죽이다가, 호텔 가서 체크인 하고 밥 먹고.
그리고⋯⋯ (세 번째 손가락이 접힌다.) 영화.
무슨 영화였더라. 몰라.
케일럽 랜킨─R:(핑거스냅.) 영화, 그래. (그놈의 영화.) 뭘로 예매해 뒀어?
아니, 아니. 됐어. 멍청아. 너한테 맡겨봤자지, 됐어. 내가 할래.
어어. 그래. 그래라. 잘났다~ (뭔가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리고 덥썩 손목을 잡아챈다.) 들어가기나 해. 나 추워.
케일럽 랜킨─R:(손목이 집히자 약간 뜨헉⋯한 얼굴로 랜들을 올려다본다. 나 이랬던가?) ⋯⋯⋯⋯안에? 자리 없는데.
랜들 록스버그─C:자리가 왜 없어? (그는 당신을 쳐다보지 않는다. 개의치 않고 유리 문을 밀어 연다.)
KP:⋯⋯하지만 랜들, (뭐, 일단 보이는 건 케일럽이긴 하지만요!) 당신의 말이 맞았습니다.
앉을 자리는 당연히 없고, 음료나 디저트를 시킨다면 최소 십오 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종업원:(바쁘게 커피를 내리던 직원이 고개를 든다.)
(낯빛이 환해진다.) 어머, 록스버그 씨!
오랜만이에요! 한동안 안 보이셔서 어디 다른 단골 카페가 생기셨나 했지 뭐예요.
랜들 록스버그─C:아하하⋯⋯. (그건
당신의 습관이다. 웃어 얼버무리는 것.)
네, 뭐, 오랜만? (반대쪽 손만 든다. 까딱.) 그런데 여기, 지금 자리가 없어 보이는데.
저 그냥 갈까요?
아뇨, 아뇨! 가지 마세요. 자리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다른 데 가지 마세요.
여기에 계세요.
보고 싶었다니까요!
카페를 바글바글하게 채웠던 사람들은 모조리 사라졌고, 당신들뿐입니다.
랜들 록스버그─C:⋯⋯타─다. (고개를 돌린다. 당신을 내려다보며, 그는 입꼬리만 올려 대충 웃었다.)
조용해서 좋지?
케일럽 랜킨─R:(눈 크게 뜬다. 그리고 랜들-그 안에 있는 케일럽-을 본다.) 잠깐⋯.
(잠깐, 잠깐, 잠깐⋯)
(⋯ ⋯ ⋯ ⋯.)
(⋯⋯음,) 뭐, 됐나.
랜들 록스버그─C:뭐, 됐지. (말투를 따라 한다.)
커피 뭐 할래? 나 아메리카노.
(그냥 내가 평소에 시켰던 거 시켜도 괜찮나? 그럼 티 안 나나? 단순히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세계가 붕괴될 가능성이 ⋯ ⋯ ⋯.) 어.
영화 예매할 거야. (휴대폰 꺼내서 노려본다.) 알아서 내가 먹던 거 시켜놔.
(그리고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영화관 전화번호 버튼을 누르고 귀에 댄다.) 영화 예매하려고 하는데요.
랜들 록스버그─C:네가 먹던 게 뭔데? (깜빡. 깜빡.)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잖아. 너 언제는 청포도 에이드 마신댔다가 언제는 라떼 마신댔다가⋯⋯
에휴, 됐다. (까딱.) 맘대로 시킨다?
케일럽 랜킨─R:(대답 대신 손 움직이며 훠이훠이한다.)
랜들 록스버그─C:(들으라는 듯이 한숨 쉬면서,) 아메리카노 하나. 시원하게요. 그리고⋯⋯ 음.
흐음.
흐으으으음⋯⋯.
딸기 요거트 스무디에 휘핑크림이랑 자바칩 추가하고 초콜릿 드리즐 두 바퀴.
(뒤 돌아보기 전에 고개 다른데로 보고 있다.)
랜들 록스버그─C:역시 넌 내가 개소리를 해야 반응을 해.
빨리 안 고르면 진짜 저거 주문한다.
케일럽 랜킨─R:음료에 잡다한 거 다 빼서 주세요.
(깜빡. 깜빡.) ⋯⋯.
⋯⋯?
위화감 점수 9점 상승. 지금까지의 누적 위화감 점수는 9점입니다.
너 머리 바꿨나?
뭔가 다른 느낌⋯⋯ 흠. (고개를 훅 들이민다. 뚫어져라⋯⋯)
(반응이 굼뜨다. 뒤늦게 제 앞머리끝을 만진다. 무어라 하는 대신 랜들-케일럽-을 올려다보며,) 왜.
랜들 록스버그─C:아니, 뭔가⋯⋯.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으─음.
케일럽 랜킨─R:(시선이 구르다가 옆으로 도망친다⋯)
⋯⋯모르겠다. (휙 고개 돌린다.) 그렇대요. 쟨 대충 아무거나 주세요. 네. 네. 만들기 편한 걸로요.
뭐 결제도 알아서 하시고⋯⋯. (카드 대충 꽂았다가 뺀다. 얼마 나왔는지는 들여다도 안 본다.)
케일럽 랜킨─R:(이 새낀 내 몸에 들어가서도 사람을 계속 쳐다보네. 그리고,)
(그리고 말야.)
(난 저렇게 성의 없지 않았어!)
(생각하니 열 받네.) 먼저 가서 앉을래.
랜들 록스버그─C:(지갑에 카드를 밀어넣는다. 가벼운 휘파람.) 그러든가.
디저트 시켜 줘?
랜들 록스버그─C:그렇대요. (다시 카드 꺼낸다.) 아, 여기 쿠폰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새로 하나 만들어 주시고⋯⋯ 네, 네.
아, 다음부턴 진짜 자주 온다니까?
아아~ 진짜 자주 온다니까! 뭐 때문에 삐진 거지? (이젠 종업원이랑 떠들고 있다.)
종업원:(주: 그녀는 스물다섯쯤 먹은 듯한
귀여운 여자애다.)
(풀뱅으로 내린 앞머리, 귀에서 달랑거리는 작은 보석 귀걸이.) 좀 자주 오세요!
케일럽 랜킨─R:(아~~~~~ 진짜 짜증 나네, 이 몸.)
(자리에서 종업원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랜들이 오면 앞을 본다.) 뭔 얘기를 그렇게 오래해.
랜들 록스버그─C:(한참 떠들다가 돌아온다. 맞은편에 걸터앉는다. 자세가 정갈하다. 우스울 정도로.) 응?
쟤가 나 좋아해서.
놀아 줬어. 귀엽잖아.
(양손을 깍지 끼고 뒷통수에 댄다. 몸을 한껏 뒤로 젖힌다.) 넌 관심 없겠지만. 그래서 영화 뭐 예매했는데?
케일럽 랜킨─R:(살짝 입꼬리 올라간다.
하하하.)
(웃기잖아. 못 참겠다. 나도 사람인데 좀 웃자.)
오, 웃었다. (구태여 지적한다.)
케일럽 랜킨─R:(곧바로 정색했다.)
말할 수 없는 비밀.
뭐가 비밀인데. (잘못 알아들었다.)
케일럽 랜킨─R:(앞의 말은
완전히 무시한다.) 네가 뭐 예매했냐며.
그거 예매했다고.
랜들 록스버그─C:아~⋯⋯ 그게 영화 제목이야?
별로 재미 없을 것 같애. (카운터에서 이름이 불린다. 록스버그 씨!)
케일럽 랜킨─R:보고 싶었는데, 상영하는 곳이 없었어. 이런 건 하. (
들켰네.)
(어떻게 알았지? 그 영화 별로 재미없었다는 거.)
(티 많이 났었나 그때? 아니⋯ 나름 재밌게 본 티 냈었는데.) 너 부른다.
빨리 꺼져.
랜들 록스버그─C:얘가 오늘따라 왜 이런대. (여전히 태연자약하게 몸을 뒤로 기울이고 있다. 그러자,)
눈을 감았다 뜨자, 테이블 위엔 음료와 케이크가 놓여 있습니다.
모든 것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마법처럼.
무엇도 스스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계가 "그"를 위해 돌아갑니다.
케일럽 랜킨─R:(그러자, 케일럽 랜킨 안에 있는 랜들 록스버그는 생각했다.
존나 편리하네!)
랜들 록스버그─C:내 전의⋯⋯ 전의 전의 여자친구가 그랬는데, (손가락을 꼽는다.) 여기 커피가 맛있대.
근데 나는 잘 모르겠더라. (빨대로 얼음을 툭, 툭, 건드린다. 이건 아마도 케일럽의 습관.) 그래서.
왜 대낮부터 성질이야? 기껏 만나 놓고선.
(얜 도대체 왜 이럴까?)
(그래서 나는 눈을 감고 잠~깐 어제의 일을 회고했다. 랜들 록스버그도 사람인지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만스러운 점이 더 생생히 감상에 남았다. 팔짱을 꼈다.)
(고맙다거나 미안해 같은 건 죽어도 안 할 거야.) 원래도 이랬거든.
(포크로 딸기를 뭉갠다.)
랜들 록스버그─C:아아. 음. (그러자,
랜들 록스버그는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는 양 제 손을 내려다보며 손거스러미나 뜯기 시작했다. 틱. 틱.)
(틱⋯⋯) 뭐 언제나 그랬긴 하지. 그렇네.
(⋯⋯틱.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간다.) 그거 맛있어?
케일럽 랜킨─R:(으레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좌우반전되지 않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흔하지 않다.)
(케일럽의 몸에 앉아 왜곡되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뭐랄까, 굉장히⋯ ⋯) 이상한 일이야.
(묵묵부답으로 케이크를 한 입 먹어보다가 턱을 괸다.) 비밀이야.
아무것도 말 안 해줄 거야, 너한테는.
(너도 좀 당해봐야 해.)
(네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야, 안 그래. 케일럽 랜킨?)
랜들 록스버그─C:("뭐가 이상한," 까지 뱉은 그의 말허리가 잘렸다.
"비밀이야.")
(그러니까,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랜들 록스버그.)
(⋯⋯의 몸을 뒤집어쓴, 자신이 정말로 당신이라고 믿고 있는 케일럽 랜킨.)
(그러므로 그는 고개를 든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당신이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글쎄, 잘 모르겠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케일럽 랜킨은, 결국엔 당신을 바라보게 되어 있으니까. 언제나.) 왜?
나 그렇게 못 미덥나⋯⋯? (핏방울이 맺힌다. 그가 냅킨을 하나 뽑아 자신의 엄지에 돌돌 말아 감싼다.)
케일럽 랜킨─R:(못 미덥긴 해.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애초에 그렇게 느끼기 위해 많은 사실을 내다 버렸다. 그리고 방금은⋯ 뭐, 일종의 버릇이었는데.)
(알다시피 이런 버릇 하나하나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핏방울이 맺힌 것을 본 동시에, 냅킨을 손가락에 끼워서 건네었다.)
(그리고⋯ 앗차.)
위화감 점수 7점 상승. 지금까지의 누적 위화감 점수는 16점입니다.
⋯⋯랜들, 그러니까 정확히는 케일럽 몫의 유리잔이 급작스레 깨집니다.
랜들 록스버그─C:(그는 음료를 반의 반도 채 마시지 않았던 탓에, 폭발하듯 터져 버린 유리잔에서 액체가 줄줄이 새고 있었다.)
(그러나 다 마시지 못한 커피는 케일럽의, 엄밀히 하자면 랜들 록스버그의 몸을 뒤집어쓴 케일럽의 옷자락에⋯⋯)
(⋯⋯튀지 않았다.)
(그의 옷엔 눈물만한 얼룩조차 생기지 않았고, 커피는 테이블 가장자리에 맺혀 뚝뚝 눈물처럼 떨어질 뿐이다.) 오.
운이 좋았네.
(덕분에 당신의 행동에서 느끼던 어떤 위화감은 금세 사그라든다. 그가 냅킨을 건네 받는다.) 아─아. 귀찮아.
대충 냅킨으로 테이블을 훔치다 말고,) 마법처럼 사라져 버리면 좋겠어.
테이블을 엉망으로 만든 커피 얼룩은 이미 죄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케일럽의 잔은 원상복구되어 있고, 아메리카노는 다시 컵의 끝까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랜들 록스버그─C:뭐, 그렇네. 운이라는 게.
(포크를 집어든다. 눕혀 무스의 끝부분을 자른다.)
(입에 넣는다.) 새콤하다.
그리고 여기 디저트가 맛있다는 말은, 전의⋯⋯ 전의 여자친구가 했었어.
어떻게 생각해?
케일럽 랜킨─R:(뭐⋯ 무언주문의 마법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놀랍지 않은 것들이다. 순수한 핏줄의 내가 살고 있던 세계라는 건, 그래서 나는 다행스럽게도.)
(두 번은 당황하지 않는다.)
(아, 잠깐만.)
(이 새낀 내 여성편력을 왜 이렇게 의식해?)
(전 여자친구? 마야 시나트라? 걔랑 이런 곳 안 왔어.)
(아, 안 돼⋯ 슬슬 대답해야 해.) 그걸 왜 물어보는 건데?
랜들 록스버그─C:아니, 궁금할 수도 있지? (슬슬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된다.)
뭐, 알면 내가 너 해칠까봐? 디저트 맛에 대한 감상으로 뭘 해칠 수 있는데.
너 그거 병이다, 병이야. (그러나 전혀 심각한 투는 아니었고, 기실은 그다지 대단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싫음 말아.
케일럽 랜킨─R:사람 앞에 두고 자꾸 여자친구, 여자친구. 짜증 나 죽겠다. (맞아, 짜증 나. 이 새낀 병자야. 그러니까, 씨발. 내가 정신병자를 연기해야 한다고?)
(그렇다고 해도 크게 심력을 소모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정신병증 연기라면 3학년 기말 실기에서도 했어. 내레이터로⋯ 이건 결이 다르지만.)
다 먹었어. 일어나자.
랜들 록스버그─C:언젠 대단하게 신경 썼다고. 소개해 줘? (심드렁하니 대답한다.
케일럽 랜킨이 연기하는
랜들 록스버그에게는 기이할 정도로 빈틈이 없다.)
그나저나⋯⋯ 생각해 보니 밥 먹기 전에 디저트를 먹은 꼴이 됐네. (일어선다. 자세는 올곧고 정갈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안 들어가겠다 싶으면 가서 토하고 와.
택시 부를까? 걷기 싫지?
케일럽 랜킨─R:(그래서 나는 눈치챈다. 이거⋯ 좌우반전만 안 된 건 줄 알았는데. 보정까지 되어있는 거야?)
(진짜 황당하다. 생각이 너무 껴. 감정선이 이따위인 배역은 아무도 안 볼 거야!)
걸을래. 소화시킬 거야.
랜들 록스버그─C:(대답도 듣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누르는 중이었던 그가, 멈춘다.)
(고개를 든다.) 웬일이래.
(그러나 더 토 달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도 물론, 않는다. 휴대폰이 코트 주머니 안에 밀려 들어간다.) 그러든가, 그럼.
보자⋯⋯ 호텔까지 삼십 분. 날은 별로 춥지도 않고.
그런데 이건 확실히 하자. 걷는 게 목적이야, 소화시키는 게 목적이야?
케일럽 랜킨─R:(너 개빡치게 하려는 목적.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그래도⋯ 이것 봐. 이질감이 안 들잖아? 생각해보니까, 씨발. 이 새낀 날 개빡치게 하려고 이러는 것 같아.)
(아니⋯ 왜 이렇게 생각할수록 열받지? 얘 몸에 들어와 있으면 다 이러나? 아니, 생각을 해서 열받는 거다. 자신의 몸 안에 들어가 있을 케일럽을 바라본다. 행복해지, 새끼야?)
(행복해 죽겠지? 이면 세계라더니, 정말로.)
(정말 원하는 걸 다 이뤘네. 축하한다.) 걷고 싶어서.
얹힐 것 같아, 지금⋯.
소화시키는 게 목적이었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었어. 원하면 이루어지니까.
그런데 걷는 게 목적이라면야.
그렇다면 걸어야지⋯⋯. (군말 없이 카페의 유리문을 밀어 연다. 당신이 나설 때까지 잡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넌 항상 얹힐 것 같다고 생각하잖아?
항상 얹힐 것 같고, 뭐만 하면 속이 안 좋고 머리가 아프고. 매번 언짢고 세상만사가 다 짜증나고.
괜찮아. 책망하는 건 아냐. 딱히 신경 쓰진 않아. (까딱.) 안 나와?
케일럽 랜킨─R:(
그러게.) 너랑 다르게 몸집이 작아서.
위장도 작거든. (그런 주제에 또 되는 대로 집어넣어서. 뇌는 작은데, 생각은 존나 많아서. 잡아주는 대로 익숙하게 문밖으로 나선다.)
(주제를 몰라서. ⋯라고.)
(생각해버렸다.)
랜들 록스버그─C:늘려 줘? (별 생각 없이 대답한다. 새삼스럽게도
당신이 자각했을 사실 하나, 그는 정말로
무던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다.)
(분장용으로 분칠한 듯 석고 마스크를 한 겹 뒤집어 씌운 듯, 사람보다도 차라리 잘 조형된 물건처럼 보인다.)
케일럽 랜킨─R:(원하는 대로 전부 이루어진다면서, 여기가 꿈인지도 모르는 멍청이. 그리고 이렇게 되니, 느끼는 거지만.)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모르는 척 하는 거지.)
(⋯얘도 일부러 이러는 건가?)
늘려 봐.
랜들 록스버그─C:("
정말?" 하고 묻는 대신에,) 원한다면.
(그리고 손가락이 맞부딪친다.)
호텔 가서 기대해. 나오는 걸 죄다 집어 넣고도 배가 고파서 팝콘을 두 통이나 퍼먹게 될 걸.
안 추워서 좋다. 가자.
길은 올곧게, 아주 올곧게 일직선으로 이어집니다.
날은 전혀 춥지 않고, 오히려 겨울의 선선한 공기가 뺨을 간질여 우습게도 기분이 산뜻해집니다.
둘이 도착해 서기만 하면 신호등은 파란 불이 되고, 둘이 지나가기만 하면 행인들은 적당히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길을 터 줍니다.
호텔에 도달합니다. 여섯 시 삼십 분이 다 되어서야 들어갔던 그곳.
현재 시각은 다섯 시 사십오 분. 지각하는 새끼가 없으니 일이 이다지도 쉽게 풀립니다.
대기하고 있던 벨보이는 둘을 22층의 레스토랑으로 안내합니다.
겨울인지라 해는 서서히 떨어집니다. 덕분에 창밖으로 런던 시내의 야경이 한눈에 보입니다.
예약 시간에 삼십 분 가까이 늦은 누구가 없어서, VIP인 당신들은 아무 문제 없이 무사히 야경이 보이는 창가 자리를 안내받습니다.
종업원:(그리고 그녀가 다가온다. 랜들 록스버그가 냅킨을 건넸던 바로 그, 젊고 사랑스러우며 조금 허둥거리는 여자애.)
(그러나 케일럽 랜킨의 세계에서 그녀에겐,)
(이목구비가 없다.) 오늘 준비된 주류는 샴페인입니다.
바로 코스를 준비하기 전, 혹시 제가 도움을 드릴 일이 있을까요?
랜들 록스버그─C:(냅킨을 펴 무릎 위에 정갈하게 둔다.) 전 딱히 없어요.
넌?
케일럽 랜킨─R:(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면서 창밖을 바라본다. 아, 도저히 스파클링은 아니야.) 레드 와인요.
(망해라, 망해.)
위화감 점수 1점 상승. 지금까지의 누적 위화감 점수는 17점입니다.
꼭 지 같은 거 고르네⋯⋯ 네, 그렇대요.
종업원:(고개를 까딱인 종업원이 빠르게 사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전빵을 가져온 것은 다른 종업원이다. 그 또한 이목구비가 없다. 누군가 찰흙으로 뭉쳐 뭉개 놓은 듯이.)
랜들 록스버그─C:(목이 긴 잔을 들어올린다. 장밋빛 술이 찰랑거린다.) 건배할래?
(좀 괘씸한데? 아, 이게 아니야.)
(건배사는 뭘로 할래.,사람 하나 살리겠다고 팔자에도 없는 병자 연기를 하는 나를 위하여,) ⋯⋯건배.
(잔을 딱 부딪힌다.)
랜들 록스버그─C:(그의 잔은 샴페인이었고 당신의 잔은 와인이었던지라, 모양과 길이가 다른 두 잔이 맞닿았다.)
(챙, 하고 가벼운 소리가 난다. 샴페인 기포가 톡톡 터져나간다.) 건배.
안 할 줄 알았는데. 또 이런 건 잘 한단 말야⋯⋯. (잔을 기울인다. 술이 넘어간다.)
종업원:(그렇게 건배가 완료될 즈음에 첫 코스가 서빙된다. 발사믹을 두 바퀴 두른 가든 샐러드. 야채는 차갑고 드레싱은 혀끝이 아릴 정도로 새콤하다.
자극적이다.)
케일럽 랜킨─R:(잠깐,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 많아.)
달고 짜보이는데 괜찮아? (너 말이야. 너, 너, 너.)
위화감 점수 10점 상승. 지금까지의 누적 위화감 점수는 27점입니다.
달고 짜 보이는데. 하는 지적이 문제였을지, 괜찮아? 하는 질문이 문제였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간에, 당신의 방금 행동은 꽤⋯⋯ 세계에 무리를 주는 일이었나 봅니다.
바로 옆, 레스토랑의 통유리로 된 벽면에 쩌적 하고 금이 갑니다.
물론 이 레스토랑의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진 못한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랜들 록스버그─C:응? 상관 없, (깜빡.) ⋯⋯얼레.
어라, 유리.
금 갔다. (⋯⋯어조가 너무 태연하지 않아?)
자리 옮겨 달라고 할까?
케일럽 랜킨─R:(⋯⋯이 정도 걱정은 좀 해라!)
(방금, 방금 뭐가 문제였지? 아, 그래⋯ 됐다. 이미 저질러 버렸으니까.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다. 뭐, 놀라줘야 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밥맛 떨어져.
다른 데 갈래.
랜들 록스버그─C:응? (그 말엔 조금⋯⋯ 표정이 변했을지도.)
다른 데 가겠다고? 지금?
다른 데로 옮기자고.
난 또, 다 때려 치우고 나가자는 뜻인 줄 알았지.
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성질머리 지랄맞잖아.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KP: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고, 당신들은 곧 다른 자리를 안내받았습니다.
통상적으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식사 중 자리를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아마 당신이 제일 잘 알 겁니다.
그러나 이곳에선 그런 규칙 따위 없어요. 그가 원하니까요.
얼마나 편리한 세계입니까, 굳이 나가야 할까요?
랜들 록스버그─C:(여전히 야경이 보이는 자리다. 그는 다시 정갈한 자세로 앉았고, 냅킨을 펴 무릎 위에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샐러드는 못 먹겠네.
케일럽 랜킨─R:(의식하지 않는 것은 위화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케일럽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면,)
(이 능력을 인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모르겠다. 한 번 저지르고 생각해야지.) 그냥 벽을 고쳐달라고 할 걸 그랬나.
랜들 록스버그─C:⋯⋯. (고개를 우로 기울인다. 마침 완두콩 수프가 서빙되던 참이었다.)
(바로 대답하는 대신에 그는 넓적한 스푼을 든다. 당신 몫의 오목한 접시에 수프를 덜어 주면서,) 뭐, 원한다면.
그런데 이미 옮겼잖아. 그런 건 옮기기 전에 이야기했어야지.
손 많이 간다, 많이 가⋯⋯. (그리고 자신 몫의 접시에도 수프를 던다.)
케일럽 랜킨─R:알아. (아는데 케일럽 랜킨은 일어난 일에 대해 계속 후회하고 있잖아.)
(이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밥만 먹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아까의 귀여운 종업원을 여기로 불러서 떠먹여 달라고 농담하는 그런 상상이나 하고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도피축에도 못 끼는 짓이다.)
랜들 록스버그─C:(이번엔 대답이 없다. 그는 완두콩 수프를 떠 먹는다. 오른쪽 나이프 옆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중간 크기의 스푼을 사용했고, 안에서 바깥으로 긁어내듯이 떠 올린다.
그의 테이블 매너는 완벽하다.)
(그래서 이런 곳에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곳에 있어도 되는 사람 같다.)
스파이스가 진해. (스푼을 물고 대답하지 않는다. 행동거지가 정갈하기 짝이 없다.) 오늘 코스 괜찮은데.
종업원:(디너 코스는 그들이
이전에 겪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제공된다. 다음으로, 생선. 허브와 레몬, 와사비와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곁들인 송어 필레. 머스터드 탓에 코끝이 찡할 것이다.
자극적이다.)
케일럽 랜킨─R:(아, 씹⋯ 혈당 관리하고 있었는데.)
(괜찮아. 현실이 아니니까⋯ 어차피 이건 내 몸도 아니고. 케일럽 랜킨이 연기하는 나는 무턱대고 이걸 욱여넣지도 않을 거다.)
(문제는 나다. ⋯조금 서글프게 송어를 뜯는다.)
(달고 짜⋯ 그리고, 생선이랑 눈 마주쳤어.)
랜들 록스버그─C:(그렇다. 케일럽 랜킨이 들어 있는,
이 장소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랜들 록스버그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법이 없다.)
(당신은 어쩌면 눈앞의 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까지 그린 듯하다고? 따위의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정도로 그는 매체 속의 도련님 같은 태도를 보였으니까.)
(생선살이 작게 잘린다. 그는 씹으면서 대화하지 않는다. 샴페인이 넘어간다.)
표정 왜 그래?
길거리에서 토사물 본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케일럽 랜킨─R:아, 나 진짜 밥 먹는데⋯ ⋯.
랜들 록스버그─C:그치만 사실인걸. (T발 C.)
케일럽 랜킨─R:(안 이랬어. 씨발.) 옛날 생각나서.
넌 몰라도 돼.
랜들 록스버그─C:내가 알아도 되는 게 있긴 해?
(그다지 따지는 투는 아니었다. 물론. 그보다도 순수한 질문에 가깝다.) 항상 그러더라.
케일럽 랜킨─R:(내 말이. 솔직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별 기대 안 해. 괜찮아. (⋯⋯남은 생선살이 마저 입안으로 들어간다.)
넌 늘 그랬잖아. 열일곱⋯⋯ 열여섯. 열다섯?
케일럽 랜킨─R:(열일곱. 나도 안다고.) 불만스러워?
종업원:(와중에도 새로운 요리는 착실히 서빙된다. 파스타. 앤초비. 페퍼론치노에 페스토를 곁들였다. 면은 알덴테. 짜고 맵고 얼얼하다.
자극적이다!)
케일럽 랜킨─R:(입맛이 뚝 떨어진다. 포크를 아무렇지 않게 테이블에 툭 내려놓는다.) 배불러.
아까 위장 늘려 줬잖아. 거짓말쟁이야.
케일럽 랜킨─R:(그래, 모든 것이 네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세계.)
(네 멋대로, 네가 바라기만 하면.)
(그리고 그건, 케일럽 랜킨이 아니라, 나. ⋯케일럽 랜킨이 생각하는 나.)
(⋯ ⋯ ⋯.)
(얘는 나를 왜 이렇게 생각하지?)
왜 해준 거야? (물어봐야지.)
케일럽 랜킨─R:별로 너와 상관없는 일이었어. (지금이 기회야.)
아닌 것 같은데. 넌⋯⋯, (파스타가 돌돌 말려 입에 들어간다.) 기분 좆같으면 나한테 지랄하잖아.
(씹느라 잠시 말이 멈춘다. 이어지는 말은 한참 후다.) 그리고, 음. 굳이 그게 아니어도.
나는 많은 걸 가졌지. 너는 안 그렇고.
적선이 뭐가 나빠?
케일럽 랜킨─R:적신이었어? (적선이라고 생각해?)
내가 불쌍하냐? (말해, 케일럽 랜킨.)
랜들 록스버그─C:말이 그렇다는 거야. (포크를 내린다.)
이것 봐. 또 나한테 지랄이지.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선, (그는 냅킨을 집어든다. 두 장.) 역시.
해 달라는 거 그냥 해 주는 게 이득이잖아.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내민다.) 입술.
묻었다.
괜찮아. 그다지 어렵지 않아. 넌 바라는 게 많은 것치곤 사소하고 같잖아서.
케일럽 랜킨─R:말 하라는 게 그따위로 하란 소리는 아니었어.
넌 그걸 할 수 있어. (어려운 걸 시키는 게 아니다. 네가 원하면,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케일럽 랜킨 너는, 네 자신에게 상처주고 싶었을 뿐이야.)
(냅킨 짜증스럽게 잡아챈다. 피해망상이나 다름없는 듣고 있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다.)
사소하고 같잖은 사람이랑 왜 놀아줘?
랜들 록스버그─C: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신기하지, 내가 바보 병신이 아니라는 거. (샴페인 잔이 기울어진다. 장밋빛 술은 이제 절반 정도 남았다.) 네가,
원하는 것들.
내 눈엔 사소하고 같잖아. 왜 그런 것들을 원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원한다고 하니까. 그리고 나는 들어줄 수 있고.
그래서 그런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적선이라고 표현한 건 그게 정말, 내게 아무 일도 아니라서야. 무슨 사감이 더 필요해?
종업원:(둘이 무어라 말하건
코스는 멈추지 않는다. 그가 바랐기 때문이다. 디저트 이전의 메인.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가 당신의 쪽에, 화이트와인과 관자를 사용한 키조개 스테이크가 그의 쪽에 놓인다.)
케일럽 랜킨─R:(나는⋯ 어쩌면, 조금은⋯ 맥이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억울하다는 것은 비틀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화조차 나지도 않는다.)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고있는 것 같다.)
(헛웃으며 의자에 느슨히 기댄다. 이 호텔의 의자, 푹신하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 너도 은근히 좋아하고 있었구나.)
야, 내가 왜 그런 같잖고 사소한 거에 매달리고 있는 것 같아?
네 빈약한 머리통으로 생각해 봐.
랜들 록스버그─C:음. 가진 게 없어서. (그리고 그는⋯⋯ 우습게도, 조금도 동요한 것 같지 않았다.)
잘 모르겠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너에 대해 알아내려 하는 건 소모적인 일이야.
아웃풋에 비해 인풋이 너무 크지⋯⋯. (칼은 접시 바닥을 긁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정갈한 몸짓이다.) 관자 맛있다.
먹어 볼래?
⋯안 먹겠다는 뜻이야.
호의로 말해도 지랄. (미련 없이 자기가 삼킨다.)
케일럽 랜킨─R:내가 생각하기에 너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어. 이거 알아? (이름을 갖다붙이지 않는다. 이 가짜들.)
랜들 록스버그─C:내가? (그땐 고개를 들었다. 식기를 내리지 않은 채.)
나를?
나를, 랜킨?
너, 너, 너.
언제나 네가 문제였어. (케일럽 랜킨.)
아닌 거 알면서.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좋아지나?
케일럽 랜킨─R:(알긴 아네, 씨발.) 그런가 보지.
널 비난해서 내 기분이 나아진다면, 그렇게 해줄 거야?
랜들 록스버그─C:하지 말라고 한다 해서 안 할 것도 아니잖아.
그게 아니면 딱히 살아가는 방법도 모르고.
케일럽 랜킨─R:그딴 빈말 좀 작작해. 괜찮을 리가 없어.
랜킨, 너는⋯⋯, (이쯤 디저트가 서빙된다. 우유 푸딩 위에 새콤하다 못해 혀가 아린 오렌지 젤리를 얹었다. 그것은 정말 귀한 물건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내가 나를, (케일럽 랜킨이 랜들 록스버그를,)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했지.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오히려 네가, (랜들 록스버그가,) 나를. (랜들 록스버그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케일럽 랜킨가 너랜들 록스버그를 과소평가한 적 있어?
(뒤늦게 제 몫으로 배분된 푸딩을 사납게 으깨기 시작한다. 파인다이닝에 와서 잘하는 짓이다.)
랜들 록스버그─C:(그건
케일럽 랜킨이 할 법한 짓이라,
케일럽 랜킨은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다.)
넌 스스로가 영민하고 영악하다는 착각을 좀 버려.
너 안 똑똑해. 멍청아.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좆같은 선택만 할 리 없지.
그래도 네 옆에 있어 주는 거야. 넌 나마저 없으면 분명 어디에서 고독사했을 걸.
너케일럽 랜킨는 내랜들 록스버그게 고마워해야 해.
푸딩 예쁘다. 황금빛이네. (디저트 스푼이 흰 우유 푸딩을 떠 올린다.) 다음엔 어디 갈까?
케일럽 랜킨─R:(음식은 질린 지 이미 오래다.)
카지노. 구경만 할 거야, 나는.
넌 간혹 찾아오는 행운에 과하게 큰 고양감을 느끼니까.
뭐, 그래도. 다행이지. 칩은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으니까. (디저트를 깔끔하게 비운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가자. 카지노.
다시 카지노입니다. (물론, 이 "랜들 록스버그"에게는 '다시'가 아니겠지만 아무튼.)
앳된 인상의 벨보이가 둘을 카지노 내부로 안내합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당신의 기억보다 훨씬 휘황하고 찬란하며 또, 요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커다란 샹들리에는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휘영청 빛나고, 사방에서는 비명 같은 찬성이 들려옵니다.
얼굴 없는 딜러가 칩을 쌓고, 쌓고, 또 쌓아서 산을 만듭니다.
슬롯머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희비와 만감이 교차합니다.
단 한 번의 룰렛에 돈을 몽땅 잃은 사람이 권총 자살을 감행하는 모습.
KP:랜들, 케일럽,
이성치 체크 진행합니다.
이곳, 케일럽이 생각하는 완전한 세계가 아니었던가요?
그런 완전한 세계에서 사람이 왜 자살한단 말입니까?
샴페인 잔을 들고 지나가던 벨보이 하나가 당신 쪽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저예요.
잠깐 주문의 힘을 빌어 세계에 간섭했어요. 하트는 잘 찾고 계세요?
아아⋯ 그.
아뇨, 하나도 모르겠어요.
저 죽는 거 아닐까요?
종업원: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핵이라 하면 세계의 중심부에 있기 마련인데⋯⋯.
⋯⋯지금 문제는, 뭐냐하면.
이제 슬슬 세계가 트라우마나 결핍 따위의 안 좋은 것들까지 흡수하고 있다는 거예요.
뭔가 이상한 일은 없었나요? '완전한' 곳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든가.
케일럽 랜킨─R:방금 누가⋯ (사고의 현장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나 가버린 것 같긴 했는데, (
이거 말고요?)
트라우마가 그런 방식으로 발현된다고요? 어지간히 괴팍한 의식,
랜들 록스버그─C:(오천 파운드어치 칩을 바꾼
그가 돌아온다.) 너 뭐 해?
벨보이랑.
종업원:(눈을 한 번 깜빡. 무언가 어른거리던 것이 가신다.) ⋯⋯어서 오세요!
샴페인 드시겠습니까?
케일럽 랜킨─R:(모자를 한 번 푹 눌러쓴다.) 내 지갑 주워줬어.
(고개를 까딱인다.) 감사합니다. 아, 샴페인도 하나⋯⋯.
(목이 긴 잔을 하나 집어든다.) 넌?
케일럽 랜킨─R:아까 와인 마셔서 그다지. 얼마나 바꾼 거야, 너?
랜들 록스버그─C:오천 파운드. 안 마신다고? (눈매가 갸름해진다.)
KP:위화감 점수
10점 상승. 지금까지의 누적 위화감 점수는
37점입니다.
랜들, 그러니까 엄밀히 하자면 케일럽이 들고 있었던 잔이 펑 하고 터져 버립니다.
방금 전에 자살했던 그 남자가 다시 일어나 있었습니다.
그는 터져머린 머리통을 한 채 콜트 리볼버를 들고 온 사방에 총을 난사해대며 난동을 부립니다.
뭐야? (냅다 당신을 잡아끈다.) 야. 야. 뒤로 빠져.
(난동을 부리던 머리통 없는 남자가 제압되고, 곧 끌려 나가는 모습까지 바라보던 차.) ⋯⋯신기하네.
저 사람 죽지 않았었나⋯⋯?
어떻게 일어나서 저러는 거지? (이질적으로 느끼는 정도가 얕고, 미미하다. 그러나 확실하다.)
게임할 수 있겠어? (여전히 칩을 들고 있다.) 못 하겠으면 다시 바꿔 오고. 아니면 구경이나 하든가.
케일럽 랜킨─R:(
하하. 웃었지만 모자에 가려졌다. 넌 나보다 크다. 주체 없이 랜들에게로 끌려간다.) 구경만, ⋯할 건데.
아니다. 한 판만 할래.
사람 죽는 거 처음 봐?
랜들 록스버그─C:처음은 아니지. 하지만 권총 자살은 처음이야.
머글의 지팡이 무섭네~ (개소리 하면서 칩 절반 손바닥에 쏟아 준다. 스물다섯 개.) 이천오백 파운드.
난 블랙잭 하고 싶은데.
블랙잭 하자. 블랙잭.
케일럽 랜킨─R:해라, 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KP:그러나 그 말이 무색하게도, 둘은 블랙잭 테이블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얼굴 없는 딜러가 곤란한 낯으로 웃으면서 말합니다.
이곳엔 자리가 없어요.
다른 테이블로 가셔야겠네요. 이곳엔 있을 공간이 없는 걸요.
뭐야⋯⋯ 자리 없는 거 처음이야.
⋯⋯김 다 샜다. 다른 거 할래. 뭐 할까? 골라 봐⋯⋯.
(바보 같다.)
(손가락으로 한 곳 가리킨다.) 저쪽 테이블 비었네.
랜들 록스버그─C:(고개가 돌아간다.) ⋯⋯.
마작?
너 마작도 쳐?
케일럽 랜킨─R:이론은⋯ 알아. (⋯⋯모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케일럽 랜킨─R:(너무 아무생각 없는 거 아니야?)
랜들 록스버그─C:왜, 비기너즈 럭. 그런 것도 있잖아?
가자. (진짜 별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로 마작 테이블로 간다.)
KP:다행스럽게도 마작 테이블은 자리가 비었습니다. 얼굴 없는 딜러가 둘을 맞이합니다.
딜러:다만
4인을 기본으로 하는데, 한 명이 없어서요.
다른 플레이어 분께서 오실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랜들 록스버그─C:그런 걸로 앞길 막히는 거.
난 싫더라.
자리 비었나요?
(입 틀어막는다.)
너 모르는 사람 면전에 대고 뭐 해?
케일럽 랜킨─R:아, 씨발. 아니, 발에 뭐가 차여서.
벤야민 비솃:(다소 곤혹스러운 낯으로 보다가⋯⋯ 대충 얼버무리고 웃으면서 앉는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리치인가요?
케일럽 랜킨─R:미안합니다. (됐어. 어차피 죽은 사람이잖아.)
좋습니다. 그러면 바로 칩 분배하고, 게임 시작하겠습니다.
벤야민 비솃:(대충 웃으면서 넘긴다.
괜찮다는 말은 안 한다.)
각자에게 배당된 칩은 열 개입니다.
참가자 전원, 행운 판정 진행합니다.
(아⋯ 케일럽 이새끼.)
KP:플레이 순서는
딜러 - 랜들(케일럽) - 벤야민 - 케일럽(랜들)입니다.
행운 판정에 실패한 벤야민과 케일럽(랜들)은 화료 실패.
성공한 랜들(케일럽)과 딜러는 성공. 역을 정합니다.
벤야민 비솃:하하⋯⋯ 시작부터. (웃으며 등을 뒤로 기댄다.) 같이 화료 실패해 주셔서 감사해요.
케일럽 랜킨─R:(옆에서 무어라 떠들든 무시하고 패만 만지작거린다.)
벤야민 비솃:(엄청 신경질적인 사람이네. 하고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보임.)
랜들 록스버그─C:
rolling 1d4
=
3
rolling 1d2 1 케일럽(랜들) 2 벤야민 누가 론을 쏘였을 것인가!
=
2
벤야민 비솃:아⋯⋯. (곤란한 웃음.) 이런.
KP:벤야민의 칩 열 개가 각각
랜들(케일럽)과 딜러에게 갑니다.
랜들 록스버그─C:(별 생각 없어 보임. 심드렁하다.) 저기.
나 좋은 역 만들고 싶어.
희생해. (??)
KP:둘째 판.
딜러 - 랜들(케일럽) - 벤야민 - 케일럽(랜들) 순서로 진행합니다.
이게 되네. (4)
벤야민 비솃:(양손을 든다.) 이제 칩 없어요. 여기에서 더 빚 지면 큰일 나겠는걸.
(비실비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전⋯⋯ 보자. 룰렛으로 재기를 좀 노려볼까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랜들 록스버그─C:(이죽 웃으면서 손 흔들어 준다.) 안녕히 가세요?
귀여운 여자애였으면 내 칩 빌려줄 수 있었는데, 아쉽다.
케일럽 랜킨─R:(아니, 그러니까. 이 새낀 왜 이렇게 내 여성편력에 집착하는 거냐고?) 야, 앞이나 봐.
랜들 록스버그─C:나 참, 너무하네⋯⋯. (다시 고개를 돌린다. 금세 낯이 무감해진다.)
케일럽 랜킨─R:(근데 조금은 반성하고 있다⋯)
딜러:3인으로도 괜찮으시다면 계속 해 보죠. (얼굴 없는 딜러다. 웃고 있는지 알 수 없다.)
KP:벤야민의 칩 열다섯 개가
세 명에게 분배됩니다.
셋째 판. 딜러 - 랜들(케일럽) -- 케일럽(랜들) 순서로 진행합니다.
(씨발)
7
넷째 판. 딜러 - 랜들(케일럽) - 케일럽(랜들) 순서로 진행합니다.
딜러:다들 잘 하시네요! 이거, 제 입지가 조금 위험해지겠는 걸요.
어라, 아닐지도?
랜들 록스버그─C:하하, 이거 티배깅인가? (그런데
랜들 록스버그는 웃고 있었다. 고양감?)
케일럽 랜킨─R:(별로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은데. 이것도
결핍의 영향?)
아.
씨발! (쾅.)
너 칩 몇 개 남았어?
(전혀 유감스러워 보이는 얼굴은 아님.) 파트너 잘못 골라서 내 칩만 날아갔네.
케일럽 랜킨─R:그럼 버리고 가던가. (비아냥댄다.)
랜들 록스버그─C:고민 중이야⋯⋯. (별 생각 없이 말한다.) 아, 더 잘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됐다. 흥미 식었어. (이쪽도 일어선다.) 갈래.
남은 칩을 정산합니다. 한쪽은 잃고, 한쪽은 따서 그다지 큰 차이가 있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딜러의 소사희 탓에 분명히 잃었습니다.
그의 마음대로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기이한 일입니다.
랜들 록스버그─C:(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는다.) 다음, 뭐 할까?
슬롯머신 돌려 볼래? (그리고 한손으로 레버 당기는 흉내. 달칵. 달칵.)
랜들 록스버그─C:그야 난 좋아하는 거 없으니까.
그리고 넌 싫어하는 거 시키면 죽상 되잖아.
케일럽 랜킨─R:(아 진짜 싸갈머리가⋯) 그래서.
성질 좀 죽이고 살아⋯⋯.
안 해. 네가 해⋯ 네가 나보다 운도 좋으면서. 가만 보면 너 돈을 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랜들 록스버그─C:물질이 주는 위안이 있지. (이건
당신이 했던 말.)
낭비할 수 있는데 낭비하는 게 뭐가 나빠?
여유가 있는 한, 낭비는 미덕이라고 생각해. (목소리에 고저가 없다.) 슬롯머신 돌릴 거야, 말 거야?
케일럽 랜킨─R:(보고 싶은 대로 보는 사람. 그런데 단순히 네가 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것만으로 아무런 이질감이나,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아⋯⋯)
(씨발⋯ 거지 같네.)
(그냥 몇 대 패고 모른 척할까.)
안 한다고, 씨발아. 두 번 말했다.
네가 해. 가산 전부 꼬라박고 탕진하든, 사치하든 알아서 하라고.
네 돈이잖아. (네 세계고.)
(이 즈음 랜들 록스버그는 기이한 얼굴이 된다.)
(대답하는 대신에 그는 카운터로 간다. 남은 칩을 환전한다. 얼마 잃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잃었다.)
(그가 양손을 든다.) 있잖아.
나, 오늘 꽤⋯⋯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싶었거든?
그렇잖아? 불운한 일 같은 거 없었잖아.
지각도 없고.
옷에 콜라를 쏟는 일도 없어.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일도 없지.
식사 중의 불평불만도 물론, 없었고.
그랬는데 네겐, 음.
별로 안 괜찮았나 봐. 아냐?
나라고 해서 네 감정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냐.
나름 신경 써 보려고 했어. 그랬는데 잘 안 된 것 같아.
마음에 안 들 일은 하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케일럽 랜킨─R:그거야, (
전지적 케일럽 시점이니까.)
네가, (만든 세계고.)
나를, (몰라서.)
잘 보고 있지 않아서 그래.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계가 너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데도, 왜 너는 만족을 못 해? (방금의 애드리브는 배역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벗어나지는 않은 정도였다. 나는 위로해 줄 수 없었다. 나의 케일럽은 그런 말을 해본 적 없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네 기분이 나아져?
(할 말은 해야겠다. 세계가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위화감 점수 29점 상승. 지금까지의 누적 위화감 점수는 66점입니다.
휘영청 빛나던 샹들리에의 고정 나사가 풀린 듯, 육중한 소리가 들립니다.
얼굴 없는 딜러들, 신원과 국적을 알 수 없는 카지노의 객들은 단지 그 자리를 지킨 채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는 듯이, 죽는 한이 있어도.
랜들 록스버그─C:(그는 눈을 깜빡인다. 깜빡. 깜빡⋯⋯.)
⋯⋯그럼 내 잘못이야?
질문이야, 케일럽.
내 잘못이었을까?
케일럽 랜킨─R:네가 내게 그런 걸 묻는 날도 오는구나.
어차피 좆된 거, 하나만 더 말하자.
케일럽 랜킨이라면 전부 네 잘못이라고 말할 거야. 존나 웃기는 일이지?
그건 웃기는 일이네. (깜빡.)
그렇구나.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구나⋯⋯.
이게 아니었구나.
(그는 양손을 든다.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은 지폐 뭉치는 온데간데없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바꿔 보자.
더 나은 배역으로.
(그리고, 그의 양손이 당신의 어깨를⋯⋯,)
분명 머리통이 바닥에 부딪쳐 짓찧였어야 했는데, 당신은 다른 것을 느낍니다.
어깨가 떠밀려 균형을 잃고 미끄러져, 아주 높은 곳에서 바닥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버리는 느낌과 함께 한없이, 한없이 바닥으로 떠밀려 내려가다 보면,
눈앞엔 여전한 랜들 록스버그─물론, 당신의 탈을 쓴 케일럽 랜킨입니다만─라는 점에서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이 풍경이 무척.
그리고,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배역이 무엇이느냐 하면.
랜킨이 아니라 당신들과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
분명 그랬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을까, 엄마?
아빠, 나랜들 록스버그 있잖아.
친구케일럽 랜킨를 잘못 사귄 것 같아.
걔는 내랜들 록스버그 신경을 거스르기만 해.
내랜들 록스버그 탓만 하고, 나를 헐뜯고,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아.
이런 관계도 유지할 가치가 있을까?
KP:그러니까, 지금
케일럽 랜킨에 이어
이미 죽은 당신의 부모까지 연기해야 한다는 소리인가요?
진짜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랜들 이성치 체크. 이건 기본 저널로 진행합시다.
(하⋯ 진짜 씨발, 돌아버리겠네.)
(미스터 록스버그의 몸에 갇힌 랜들은 아버지의 미간을 주무른다. 참고로 이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다.)
랜들, 네 나이가 몇이지?
중요한가?
록스버그 부부:이런 일로 아빠를 찾는 건 관두라고 했잖니. (
그랬었죠, 아빠.)
왜냐하면⋯ 우린 널,
영원히 챙겨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스물일곱 씩이나 되었다면 말이다. (이제는 이해해요.)
랜들 록스버그─C:왜 영원히 챙겨줄 수 없어?
영원하면 안 돼?
좋은 것이잖아. 귀한 것. 어쩌면 나랜들 록스버그는,
당신들이 있었다면 정말 잘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영원하면 안 돼?
영원해주면 안 될까?
(가증스러워⋯) 이것 하나만큼은 영원할지도 몰라.
(이 짓도 오래는 못해먹겠더라고요.) 우린 널 언제나 사랑한단다.
그린 듯한 대답이네.
(그는 이번에도 양손을 든다.) 그린 듯한 집안이야.
이것도 아니었구나.
(그리고, 그의 양손이 당신의 어깨를,)
(이번에도.)
KP:쌓이고 쌓인 위화감이 세계를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이들 중 진짜 케일럽 랜킨이 누구의 몸에 들었을지,
맞춤으로써 당신은 핵─체인질링 하트Changeling Heart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자, 화이팅!
이중 한 명은, 케일럽 랜킨이 좋아할 법한 대답만 합니다.
이중 한 명은, 케일럽 랜킨이 싫어할 법한 대답만 합니다.
이중 한 명은, 케일럽 랜킨을 아예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짜 케일럽 랜킨이 든 랜들 록스버그는, 아마 딱 보면 아실 걸요?
케일럽 랜킨─R:나는 나를 싫어하는 편이 아니긴 한데.
이건 좀 징그럽다.
⋯나 방금 뭐라고 했지? 됐다.
야. (첫 번째 랜들 록스버그 가리킨다.) 이젠 진짜 못하겠어. 때려치우자, 그냥.
랜들 록스버그─C3:(심드렁하니 손끝만 쳐다본다.)
너 그래도 생각이라는 걸 좀 하는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펑!)
(세 번째 랜들 록스버그는 녹색과 금색이 뒤섞인 컨페티가 되어 터져나간다.)
케일럽 랜킨─R:이 몸에 들어와 있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도 성질 머리가 더러워지는 모양이야.
그렇게 배역에 몰입하는 스타일도 아닌데. (돌아본다. 케일럽이 아닌 아마도 관객을 향해서 하는 말 같았다.)
음, 뭐. 됐어.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건, 다 너 때문이잖아?
랜들 록스버그─C2: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렇게 해.
랜들 록스버그─C4:아닌 거 알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지?
랜들 록스버그─C1:(그러자 첫 번째와 두 번째 랜들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랜들 록스버그─C2:(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이번엔 오른 뺨에 보조개.)
랜들 록스버그─C1:(말이 더 이어지지 않는다.
펑!)
순식간에 세 명의 랜들 록스버그가 사라지고, 남은 건 단 한 사람.
랜들 록스버그─C4:(그는 멀뚱멀뚱 서서 당신을 바라보다가,)
영화 보러 가자.
늦겠다.
꼭 봐야 해?
나 진짜로 힘들어.
그런데 그거 안 보면, 아마 못 돌아갈걸.
(고개를 들어올린다.) 붕괴되고 있잖아⋯⋯.
너 때문에, 새끼야.
늘 너 때문이라고 했어.
앞장이나 서.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민폐처럼 느껴질 정도의 고요함.
아늑한 암흑. 미적지근한 공기. 허공을 떠도는 미미한 단내.
팝콘도 콜라도 없고, 중간에 울리는 휴대폰도 없으며,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다른 관객도 없습니다.
오로지 당신뿐인 상영관의 거대한 스크린이 희게 빛나며 무언가를 상영합니다.
그가 ‘될 수 있었던’ 가능성들의 집합이 스크린에서 상영됩니다.
⋯⋯스크린 속의 그는 처음 보는 얼굴로 웃고 있습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입을 벌립니다. 눈썹은 아래로 쳐졌고 눈꼬리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뺨을 한 채 ‘생동하는’ 그가,
케일럽 랜킨:(그가 말한다.) 여기에 있으면
무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이곳에서 나는 무언가 된 것만 같아.
이곳은 밝고 활기차.
모든 게 완벽히 제자리에 있어서 완전해.
샴페인의 황금색 거품 같고, 달걀만큼 큰 에메랄드 같아. 그러니까,
누추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여기에 있으면 안 될까?
그는 동생의 시신을 눈앞에 둔 채 서 있습니다.
핏물을 뒤집어썼고 도끼를 들었습니다. 찰박, 하고, 피웅덩이가 발을 적십니다.
이것 봐.
네가 필요해.
네가 있으면 무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네 옆에서 나는 무언가 된 것만 같아.
너는 밝고 활기차서,
모든 게 완벽히 제자리에 있어서 완전해.
샴페인의 황금색 거품 같고, 달걀만큼 큰 에메랄드 같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여기에 있어 주면 안 돼?
랜들 록스버그:(랜들 록스버그는 그 누구도 없는 상영관에서 홀로 턱을 괴고 앉아있다. 당신은 그 커다란 스크린을 독차지한 채로 서있다.)
(이곳은 공존할 수 없는 공간이다. 너는 불문율을 깬 사람이고, 케일럽.)
(관객에게 맥락 없이 말을 걸다니, 무슨 연출이 이래? 너는 객석에 있는 내가 모든 개연성을 부여해 주는 기계장치인 줄 알아⋯⋯.)
(관객과 작품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면, 등장인물의 고양된 숨소리까지 면밀하게 와닿는다. 그럼 굳이 하등 쓸데없는 정보까지 학습한다는 인간의 좆도 도움 안 되는 기능이 작동한다.)
(그렇구나, 너는⋯ 나를,)
무엇이든 달라지게 할 수 있는 대단한 인간으로 보였어?
잔뜩 망가지고 굴러 떨어져서 금투성이가 된 너를⋯
주워모아서 어떻게든 해줄 수 있는 기계장치이자, 맥거핀쯤으로 여기고 있던 거야?
케일럽 랜킨:(케일럽 랜킨은 그 누구도 없는 스크린에서 당신을 내려다 보고 있다. 당신은 그 광활한 상영관을 독차지한 채로 앉아 있다.)
(이곳은 공존할 수 없는 공간이다. 너는 그 깨진 불문율의 이유고, 랜들.)
카메라에 대고 대답을 하다니, 무슨 배우가 그래? 너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봐선 안 된다는 규칙부터 깨부수는 삼류 배우 같아.
(이젠 완연한 무표정, 고저 없는 목소리, 초점이 명료한 시선 그런 것보다⋯⋯)
(보이는 것보다 눈앞의 랜들 록스버그는 더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랬어.
그래서⋯⋯ 네가 어떻게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만 있으면, 완전한 세계 같은 거,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음, 네겐 아니었구나. (콤플렉스 덩어리는 열등감 하나 없는 인간을 상대하는 법을 모른다.)
(그리고 마음으로 절대로 못 이긴다.)
(아무리 정신병자 케일럽이라도 아, 다 틀렸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편리한 세상에서, 편리한 몸을 가지고 몸소 느꼈잖아.
너는 네가 원하는 걸 손에 넣었어, 전부 다!
세계가 너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데도, 너는 만족을 못했어.
이젠 인정해, 케일럽.
널 만족시켜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어.
그건 아마 원래 세상에도 없을 거고.
저 머나먼 너머에도 없을 거야
네가 있을 곳은 없어. 아니다.
네가 가야할 곳은 없어.
케일럽 랜킨:그러니까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말은 하지 마.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아.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귀한 것을 가지고 싶어. 그러면 나까지 귀해지는 기분이니까.
그런 게 없는데 어떻게 살아?
시비가 아니야, 랜들. 진심으로 대답해 봐⋯⋯.
어떻게 사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데, 없다면, 그렇다면 왜 사는 거야?
랜들 록스버그:(
1 1. 화면 밖 2. 화면 안)
(그러자 랜들은 객석에서 일어선다. 영화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상영관을 걸어 다니는 건 대단히 매너 없는 행위였지만, 이곳은 그런 에티켓과 개연성에 상관없이 케일럽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세계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하기로 나는 케일럽의 귀한 무언가인 모양이니까.)
(주머니에 양손을 처박고 한 걸음씩 걸어 내려간다. 한 걸음, 특별관의 거대한 스크린이 조금씩 작아진다. 개연성 없는 세계란 그렇다. 모든 걸 연출에 의지하지.)
(그리고 랜들이 스크린 바로 앞에 섰을 땐, 그 화면은 고작 브라운관보다 약간 큰 사이즈가 된다. 영화관 안을 꽉 채웠던 그는 드디어 어울리는 규격을 찾았다.)
(2007년의 덜 떨어진 해상도의 흐릿한 인상으로 나를 보고 있다.) 그건 알려줄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돌려 기묘한 눈으로 화면 너머를 바라본다.) 아직은 2007년이거든.
아직까진 모르고 살아도 괜찮아.
(돌아온다.) 조금 더 환상에 젖어서 살자.
나와. 출구가 코앞이야.
케일럽 랜킨:(드디어 어울리는 규격이다. 당신은 케일럽의
귀한 무언가이고, 그는 이제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다. 작고, 초라하고, 반쯤 억지로 끌려 들어온 당신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스크린 너머의 케일럽은 기묘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스크린을 두 겹씩이나 통과해서 볼 수는 없는 게 당연하고,)
(그리고, 애초에.)
(나는 화면 너머를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곳엔 네가 없다.) 시간이 너무 느려.
저 바깥은 너무 누추해. 초라하고 비루해. 보잘것없어서 짜증이 나. 인생이,
저 밖에선 삶이 너무 길어⋯⋯.
모르고 사는 거 못 해.
환상에 젖어서 살 수, 없어.
삶이 끔찍해. 이대로 살 수는 없어. 그러니까,
("넌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어.") 어떻게 해줄 수 있다고 해줘.
("왜, 왜⋯ 너는 내 모든 것을 방해해⋯!?") 나가고 싶을 거 알아. 너를 방해하려는 건 아니야. 나는 그냥,
("그럼 이번에도 믿어.") 믿고 싶었어. 네가 무언가 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이번에도 들어준 건 나야.") 넌 내 말을 자주 들어주니까.
("도망치지 않아도 난 괜찮아. 그래서 널 데리러 올 여유 정도는 있었어.") 도망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래서 나를 데리러 올 여유 정도는 있으니까.
⋯⋯.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혼자라서 너무 서러워⋯⋯.
(그러나 지금은 2007년. 그러므로 둘 중 어떤 내가 진짜 같느냐고는 물어볼 수 없다. 대신해서,) 나가고 싶다면,
약속해. 버리지 않는다고.
부쉈잖아. 너. 내 목걸이.
지금 네게 줄 네 몫의 체인질링 하트는 버리지 않겠다고 해.
랜들 록스버그:(흔히들, 체인질링 당한 아이는 대부분 불구이거나, 심하게 울고 떼를 쓰는 아이라고 한다.
그리고 적발이고.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건 훔쳐간 게 아니라, 원래의 주인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내다 버린 것이라서.)
(그렇게 뒤바뀐 네가 내 앞으로 내건 체인질링 하트가⋯ 귀한 것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픈 얼굴을 해버린다.)
(케일럽,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소중히 간직하면, 언젠가 보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
(손을 내밀었다.) 집어삼켜줄게. 아무도 찾지 못하게.
넌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린 어디로든 갈 수 있어. 왜냐하면, (삐ー 2007년 기준, 아직 상영되지 않은 연출입니다.)
⋯ ⋯.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너랑 같이 늙고 싶다고 하면 이상해?
케일럽 랜킨:⋯⋯.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소중히 간직하면.)
(보석이 될 수는 없을 거다. 그건 돌멩이니까. 그건 변하지 않으니까. 변할 수 없으니까.) 이상해.
(그런데 우리는⋯⋯) 그건 마치⋯⋯,
(우리는 마법사잖아.)
(그래서 어쩌면, 마법처럼,)
(기적처럼⋯⋯) 내가 마침내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너 때문에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말처럼 들려.
─넌 이상해. 그리고 멍청해. 세상의 핵이라니까.
내가 만든 세상이잖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
그렇다면 핵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어?
말을 마친 스크린 속의 케일럽은 자신의 손을 들어올립니다.
그가 자신의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드리고 나자,
손 안에 체온과 같은 온도의 따뜻한 보석이 만져집니다.
작은 심장 모양의 보석은 에메랄드 색으로 빛납니다.
아니면, 그가 보는 당신의 눈동자가 꼭 이런 색이었을까요?
천장은 모두 조각나 떨어졌고, 바닥은 어느새 새카만 허공이 되어 있습니다.
붉은 벨벳을 씌운 상영관의 의자들이 찬찬히 무너집니다.
커다란 스크린에선 이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관의 바깥으로 나가면, 다시 진짜 세상입니다.
(나가는 길에 그가 서 있다.) 안녕.
「말할 수 없는 비밀」 관람했어?
별 건 아니고, 관람 이벤트로 증정품을 제공하고 있는데.
내 마음이야⋯⋯.
그러니까, 같이 갈 거야?
진짜 세계까지?
(덥석 손을 잡는다.) 머나먼 저 세상까지 같이 갈 거야.
그런 말 하면 믿어 보고 싶어져.
통째로 유리로 된 한쪽 벽면을 통과해 기울어가는 오후의 햇볕이 들어옵니다.
잠들었던 그는 이제 상체를 일으켜 당신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저녁이야.
너 석식 먹을 거야?
랜들 록스버그:(한참 멍하니 천장을 들여다 보고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몸을 일으킨다.) 응.
내가 시킬래.
(그리고 랜들은 룸서비스를 위해 호텔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익숙한 수신음이 지나가고, 어떤 룸서비스가 필요한지 묻는 직원에게,) 네, 오늘 호텔 디너 코스로요. 그리고⋯ ⋯
부쉬 드 노엘 한 상자만 가져다주세요.
케일럽 랜킨:(옆에 앉아 눈을 부비던 그가 고개를 돌린다.)
크리스마스 아직 좀 남았는데.
그래도?
랜들 록스버그:오늘은 좀⋯ 귀여워져도 되는 날이니까.
너 다 줄게.
전부 먹어.
케일럽 랜킨:그거 다 먹으면 토하거든? (눈이 세모 모양이 된다. ⋯⋯.)
(⋯⋯일 년 중 가장 저주하는 마음이 희미해지는 날.) 됐어.
같이 먹어. 아니면 안 가.
아. 이게 뭐야. 아직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이러면 크리스마스 케이크는 새로 생각해야 하잖아. ⋯⋯.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인간 대 인간의 교류란 결국 서로를 이해했다는 착각 아래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내가 아니니까요.
우리가 타인인 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