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예의도 없이 문을 마구잡이로 두드려 대고 있었고,
아직 잠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문을 열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이렇게까지 퀭했나 싶은 얼굴. 심하게 갈라지는 목소리.
탁하고 푸른 눈을 끔뻑이면서, 그는 대뜸 말했습니다.
케일럽 랜킨:하루 온종일 네가 죽는 꿈을 꿔⋯⋯.
이 시간에 당신이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까닭은, 누군가─혹은 무언가─당신의 잠을 깨웠기 때문입니다.
가느다랗게 열린 눈꺼풀 새로 희미한 빛무리가 스밉니다.
방의 문이 조금 열려 있고, 누군가 당신의 곁에서 침대 머리맡의 협탁을 뒤적거립니다.
느리게 움직이는 시계의 초침 소리,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었을 당신의 숨소리.
이윽고 조금 저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질질 끄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발소리가 이어진 끝에,
KP:랜들, 당신은 다시 잠들 수도 있고 그냥 지금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랜들 록스버그:(손 뻗어서 협탁에 둔 시계 확인한다⋯ 몇 신데?)
랜들 록스버그:(헐⋯ 안 돼 생활 패턴 꼬인다. 그냥 더 자자.)
그러니까, 하루를 시작하려면 일러도 일곱 시입니다. 네 시는 너무 일러요.
다행스럽게도 잠은 금세 다시 옵니다. 방의 온도는 약간 서늘하고, 이불은 무겁고 두툼해서 기분 좋은 압박감을 줍니다.
괘종시계가 시끄럽게 울리며 당신의 잠을 깨웁니다.
현재 시간은 여덟 시 반. 하루를 시작하기엔 딱 적절합니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둡습니다만─케일럽의 방엔 암막 커튼이 쳐져 있는 탓에─당신의 '생활 패턴'과 괘종시계는 정확합니다.
KP:랜들, 기상합니다. 지금부터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현재 케일럽의 방에 있습니다.
이곳은 2층의 구석에 위치해 있고, 당신은 방을 나서서 욕실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2층의 나머지 방은 그의 형제자매들의 방이라고 했으니 구태여 들어갈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물론 원한다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1층으로 내려간다면 당신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욕실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 방에 남아 있는다면, 당신은 자유롭게 방을 헤집든 더 자든 뭘 하든⋯⋯ 오롯이 당신의 자유!
랜들 록스버그:(여기⋯ 암막 커튼 좀 휙 쳐두고 일어난다.) 아, 내 눈⋯.
(그리곤⋯ 그냥 거실로 나올래.)
지금은 아침이고, 이 집은 런던 교외에 위치한 2층짜리 단독 주택이며, 지금은 당신과 케일럽 랜킨 단둘뿐이라 고요하기 짝이 없습니다.
층고가 높은 계단을 건너면 금세 거실로 향할 수 있습니다.
예의상 둔 듯한 벽난로가 있고, 머글의 'TV'라거나 '에어컨'이라거나⋯⋯ 하여간에 뭐 그런 것들.
한쪽 벽면에 놓인 2인용 소파에선 당신의 지긋지긋한 케일럽이 이불을 둘둘 말고 자고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시계, 달력, 빈 꽃병이나 먹다 남은 과자 봉지 등.
(왤케 처량해 보이지.)
랜들 록스버그:(소파로 가서 알짱대본다. 케일럽 원래 이 시간에 자고 있었던가?)
씨댕ㅋㅋ
KP:역시, 그런 것까지 알 정도로 그를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KP:무엇보다도 회귀 중 케일럽의 생활 패턴은 엉망진창이었잖아요? 알 방법이 없습니다.
랜들 록스버그:(지팡이 손잡이 부분으로 얼굴 쿡쿡 찔러본다.) 야, 야.
아침이야.
그만 처 주무시고 일어나시지?
케일럽 랜킨:⋯⋯. (이불 머리 끝까지 올린다.)
오 분⋯⋯.
적당히 넓고 테이블이 딸려 있어 시원하게 트인 느낌을 줍니다만⋯⋯ 이 괴팍한 새끼, 주방에도 암막 커튼을 쳐 두었네요.
냉장고와 싱크대, 아일랜드 식탁 너머 위치한 식탁, 이번에도 꽃병 따위가 일반 가정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랜들 록스버그:(이거 혹시 내가 모르는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암막 커튼 촥 걷어내고 주방에⋯ 뭐 없어? )
보너스 다이스 하나 붙여서!
KP:커튼을 벗기자 창 밖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 그러니까⋯⋯
12월인 것치곤 바깥이 그다지 추워 보이지 않네요?
하여간에. 주방에서 먹을 걸 찾고 싶다면 냉장고입니다!
(몰라. 영국 날씨가 뭐 다 그렇지. 냉장고 덜컥 열었다.)
KP:냉장고 안엔 종이 봉투가 여러 개 들어 있습니다.
이 새낀 식료품점에서 사온 걸 정리도 안 하고 봉투째로 쑤셔박은 모양입니다.
뭐든 꺼내 보면 뭐라도 있지 않을까요?
(흠⋯ 봉투 안에 뭐 들어있음?)
(그리고 좀 정리해두자⋯)
KP:종이 봉투의 내용물을 우르르 쏟자, 대충 아무거나 집어 온 듯한 식료품이 바닥을 구릅니다.
토마토나 사과 따위의 청과류, 마트에서 묶음으로 판매하는 제과류와 같은 사소한 것들.
제일 구석에 있는 종이 봉투엔 포장된 참치 샌드위치도 들었네요! 그냥 보이는 건 다 집어 온 모양입니다.
자 이쯤에서⋯⋯ 지능 판정?
그도 그럴 게, 여기에 사람은 둘뿐이고.
당신이 여기에 더 있어 봐야 얼마나 더 오래 있는다고? 벌써 일주일이나 있었는데도요!
랜들 록스버그:(참치 샌드위치⋯ 두 개 꺼내서 가져간다.)
뭔 냉동 식품도 아닌데 이렇게 처박아 놔, 다 썩겠네.
미친 놈⋯ (냉장고 문 닫고 정확히 '오 분'이 지나면 케일럽에게로 돌아간다.)
야.
이 돼지, 멍청이, 굼벵이, 머저리, 트롤 똥아.
케일럽 랜킨:(이불 둘둘 말고 꿈쩍도 안 한다. 대답도 물론 없음.)
(손이 불쑥 튀어나와 허공을 허우적대다가 당신의 허리를 탁탁 치기 시작한다.)
케일럽 랜킨:(숨 넘어가는 소리⋯⋯ 팍⋯⋯ 팍⋯⋯)
(그리고 결국 힘주어 떠민다.) 아, 이 새끼가⋯⋯.
랜들 록스버그:(떠밀려 나온다.) 아, 미안. 반응이 없길래 마사지 의자인줄.
케일럽 랜킨:아⋯⋯, 씨발 골 울려⋯⋯. (다시 이불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다. 웅얼대는 소리가 솜에 먹힌다.) 왜 아침부터 시비야?
랜들 록스버그:네가 아침부터 처 자고 있었잖아.
어제 몇 시에 잤어?
새벽에 내 방 들어온 거 너지.
(내 방 아니지⋯ 엄밀히 따지면 케일럽 방이지⋯)
케일럽 랜킨:그럼 사람이 아침에 처 자지, 씨발⋯⋯. (웅얼거리다가,)
(정확히 그 점을 짚는다.) 엄밀히 따지면 내 방이야.
(나머지 질문엔 대답 안 한다.)
(당신은 그의 침묵이 대개 긍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랜들 록스버그:언제까지 잘 건데. 야, 사람을 집에 불러놨으면 어?
뭐라도 얘기를 해줘야 할 거 아냐.
나 여기서 계속 살아?
가족들은?
케일럽 랜킨:음. 현명한 생각. (웅얼대다 말고,) 가족?
무슨 가족? 네 가족 다 죽었잖아⋯⋯. (핀트를 잘못 짚었다. 아마도 아직 비몽사몽해서.)
랜들 록스버그:아구아 멘티. (케일럽 얼굴에.)
KP:그러니까, 분명 제대로 주문을 외웠죠?
아구아 멘티.
지팡이를 튕기는 동작도, 발음도 정확했고.
그런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요?
케일럽 랜킨:(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전히 퀭한 얼굴이다.) 정말 고맙다. 깨워 줘서.
심심하면 TV를 봐⋯⋯ 어떻게 트는지 몰라?
랜들 록스버그:루모스. (지팡이 정확히 휘두른다. 초등 마법이다.)
KP:지팡이를 정확히 휘둘렀습니다. 초등 마법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지팡이 넘겨준다.) 마법 해봐.
아무거나. 존나 간단한 거.
케일럽 랜킨:(멀뚱멀뚱 보다가 지팡이 받아 든다.) 마법을 하라고?
이걸로?
케일럽 랜킨:(표정이⋯⋯ 아주 이상해진다.) 왜?
네 지팡이잖아.
나만 그런 건가?
케일럽 랜킨:내 생각엔, 네가 잠이 덜 깬 거야. 남의 지팡이 휘두르면 마법 잘 안 된다는 거 몰라?
그런 것도 모르면서 전쟁엔 왜 나간대⋯⋯. (대충 테이블에 내려 둔다.) 심심해서 이러는 거지? TV 봐, TV.
랜들 록스버그:내 지팡이 그렇게 충직하지 않으니까⋯ 아니, 한번 해주면 되는 건데 왜 이렇게 버텨?
(지팡이 도로 가져간다. TV 앞으로 가서 버튼 누른다.)
케일럽 랜킨:아침부터 네가 좆같이 굴어서. (눈 부빈다.) 머리통 아작날 것 같아⋯⋯.
지금 상영되고 있는 영화는 주말 디즈니 채널의 인어 공주입니다.
노래를 부르며 포크로 머리를 빗는 공주의 옆에서 물고기들이 노래합니다. 랄랄랄라, 랄랄랄라, 랄랄랄라⋯⋯
흠⋯⋯ 이쯤 지능 해 볼까?
KP:그래요, 디즈니 좋습니다. 아직 아침이니 아동용 영화를 틀어 줄 법도 하고.
그런데 말이에요, 보통 이 시즌엔 디즈니 대신에 다른 걸 틀어 주지 않나요?
KP:나 홀로 집에라든가,
폴라 익스프레스라든가. 겨울 아침에 어울리는 아동용 영화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케일럽 랜킨:(리모컨 들고 TV 끈다.) 머리 울려.
케일럽 랜킨:노래하고 있잖아. 시끄러워서 머리 울린다니까. (다시 소파에 드러눕는다.) 그럼 뭘 시킨담⋯⋯.
뭐 할래? 머리 좀 굴려 봐⋯⋯ 음, 나가는 거 빼고. 쇼핑은 어제 했거든.
랜들 록스버그:(지팡이에 정신 팔렸던 것을 다시 묻는다.) 네 가족들 어디 갔어?
케일럽 랜킨:시카고. (대답은 기계적으로 나온다.)
나 버리고 놀러 갔어. (준비한 것처럼.)
그게 왜 궁금해? 인사하고 싶어?
랜들 록스버그:언제쯤 오시나 해서.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집에 들어와 있으면⋯ 서로 좀그렇지 않아?
여기 온지 벌써 일주일이야.
네 그 꿈 때문에. 이유도 모르고.
케일럽 랜킨:안 올 거야⋯⋯. (시선은 어딘가 허공을 향해 있다. 물 흐르듯 내뱉다 말고,)
(뚝. 그친다. 고개가 돌아간다.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랜들 록스버그에게 정확히 박힌다.)
⋯⋯.
⋯⋯방금 건 농담.
케일럽 랜킨:놀랍게도, 그으래. 언젠가 오겠지. (소파로 기어들어간다. 등받이 쪽에 고개를 처박는다.)
(꿈 얘기엔 대답 안 했다.) 야⋯⋯ 나 머리 아파. 머리가 진짜 아프거든. 괴롭히지 말고 가서 밥 먹어. 그리고 한숨 더 자. 어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리 집 좀 다녀올게.
순간 이동 할 거야. 그럼 됐지?
케일럽 랜킨:그것도 안 돼. 너 마법 좆같이 못 하잖아⋯⋯.
분명 중간에 실패해서 몸 반쪽 날려먹고 끔찍하게 죽게 될 거야.
케일럽 랜킨:운이 좋았네. 그런데 언제까지고 그럴 리는 없잖아.
아니, 좋아. 내가 교통사고가 난다고 치자.
근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랜들 록스버그:보통 걱정한다고 사람을 일주일 동안 본인 집에 가두냐?
케일럽 랜킨:그럼 걱정을 어떻게 하는데⋯⋯? 아, 머리⋯⋯. (마른세수를 한다. 앓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랜들 록스버그:(그는 케일럽 랜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냥 무시하고 순간 이동 마법-무언 주문-을 외운다.)
KP:판정으로 더 확인시켜 드릴 필요는 아마 없을 것 같죠?
주문은 발동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래⋯ 좋다고.
(돌연 현관문 쪽으로 걸어나간다.)
케일럽 랜킨:(쫓아나간다. 거리낌 없다.) 어디 가냐고, 록스버그.
너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밖에⋯⋯,
밖에 나가면 죽는다니까?
아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케일럽 랜킨:아니, 밖에⋯⋯ 모조리⋯⋯ 모조리 널 죽여버리려고 기다리고 있잖아.
내가 알아, 미친⋯⋯ 나 알아.
랜들 록스버그:내가 물은 건 네 정신병에서 비롯된 망상이 아니거든?
(케일럽 무시하고 그냥 현관문 문고리를 붙잡아 돌린다.)
케일럽 랜킨:(그보다 케일럽 랜킨이 빨랐다. 문고리로 향하는 손목을 잡아챈다.)
한번 더 해라.
(힘을 주어 버틴다.) 가지 마⋯⋯.
런던엔⋯⋯ 차가 너무 빠르게 다니는 것 같아.
횡단보도는 신호가 너무 짧아.
게다가 어쩐지 공기가 음습해. 음. 런던 사람들은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 죄다 우울증 환자들 뿐이잖아.
랜들 록스버그:(문고리에서 손을 놓는다.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숨길 생각도 없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행여나 운이 없어서 교통사고가 나거나, 아니면 칼 든 우울증 환자들에게 잘못 살해당할까 봐⋯
뭐, 여기서 영원히, 오래오래, 살라는 소리야?
진심이야?
케일럽 랜킨:총 든 조울증 환자들도 있고, 지팡이를 든 죽음을 먹는 자들도 있지.
(핀트가 자꾸만 어긋난다. 대화의 톱니바퀴가 전혀 맞물리지 않고 있다.) 어쩌면 네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벌써 알아차렸을지도⋯⋯.
랜들 록스버그:하? 그럼 더 안 되겠네, 여기 있으면.
랜들 록스버그:거기서부턴 네 알 바가 아니겠지?
케일럽 랜킨:왜 내 알 바가 아니야?
너 죽는 꿈을 꾼다고.
진짜, 씨발, 왜 이해를 못 해? 록스버그⋯⋯.
세상에서, (자간마다 액센트가 들어간다.) 네 생사를,
염려하는 게, 씨발아.
나밖에 없다니까?
나 그렇게 잘못 산 것 같지 않은데?
랜들 록스버그: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거 아냐?
케일럽 랜킨:잘못 산 게 아니고서야 이 꼴이 났겠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도대체, 씨발 어떻게 살아온 거야? 왜 다들 네 목을 못 따서 안달이 난 거야?
랜들 록스버그:무, 무슨 미친 소리냐니까⋯!?
아니, 알아듣게 설명해.
네가 그런 꿈을 꾼 것과 현실의 내 생사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이 정신 머리 없는 새끼야.
케일럽 랜킨:그러니까,
나 네가 죽는 꿈을⋯⋯. (근 며칠간 랜들 록스버그가 아주 이골이 나도록 들었을 말이 이어진다. 그는 고장난 태엽 인형처럼 읊는다.)
(논리도 맥락도 없다. 근거도 물론 없다. 단어가 와해되지 않았다는 점만 제한다면 케일럽 랜킨의 모든 발언은 진실로 돌아버린 사람의 헛소리 같다.)
랜들 록스버그:(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린다.)
아니, 이건 아니야.
너 정신병원 좀 가봐. 졸업하고 그동안 뭐 했어?
케일럽 랜킨:(대답 대신에 손목을 움킨 손을 움직인다. 엄지가 잠시 당신의 손목에서 떨어졌다가,)
(곧 맥을 짚는다. 케일럽 랜킨의 손끝은 서늘하다 못해 차갑다.) 너 지금 심장 뛰는 거.
아직 살아 있는 거.
여기에 있어서야. 내게 고마워하게 될 거야.
랜들 록스버그:(서늘한 감각에 붙잡힌 손을 자기 쪽으로 끌어온다.) ⋯내가 참전 중에 잠깐 나온 거란 건 기억하나?
케일럽 랜킨:(그는 손을 놓지 않았으므로, 덩달아 딸려 간다.) 그게 더 큰 문제지⋯⋯ 그쪽은 봐 주질 않잖아⋯⋯.
너희를 포로로 잡을 생각도 딱히 없을 걸, 왜냐하면 쓸모가 없으니까.
진심으로 이해가 안 돼. 고작 열일곱들이 무슨 전쟁터에 기어나가?
랜들 록스버그:그래, 그 정돈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야. 내 말은, 난 분명 가벼운 마음으로 전쟁에 나온 건 맞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고, ⋯ ⋯아니다. 이 얘긴 그만하자.
케일럽 랜킨:내 말이, 씨발! (케일럽 랜킨의 아주 사소한 불운 하나, 백린처럼 예민하고 바늘처럼 날카로운 성정을 타고났다는 것.)
(그리고 랜들 록스버그의 아주 사소한 불운 하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당신의 앞에 그가 있다는 것이다.)
랜들 록스버그:(랜들은 케일럽 랜킨을 약 8년간 봐왔으나⋯)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집착, 그리고 논리조차 통하지 않는 강요는 그뿐만 아니라, 살면서 처음이라-심지어 그 이모부부조차 후자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말문이 턱 막힌다.)
손 좀 놔봐.
안 나갈 테니까.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한참 얼굴을 노려보다가⋯⋯ 다른 손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아주 어이없게도, 바로 그 다음에 취한 행동은⋯⋯)
⋯⋯약속. (그렇다. 새끼 손가락.)
랜들 록스버그:(움찔⋯ 때리려는 줄 알고 긴장했다.)
뭐냐, 이 애새끼 같은 행동?
랜들 록스버그:(얼떨떨한 기분으로 빠르게 걸어준다.)
(손이 떨어진다.)
(손목을 매만진다.) 하려던 말 까먹었잖아.
케일럽 랜킨:잘 된 일이네. 너랑 얘기하다 보면 머리가 아프거든. (
"여기에서 더 아팠다간 정말 머리 뚜껑 열고 뇌를 박박 씻고 싶어질 것 같아⋯⋯" 같은 섬뜩한 소리가 이어진다.)
⋯⋯그러니까, 우리 집이 좀 재미 없는 건 알아. 그런데 통상적인 가정집은 다 이렇잖아.
뭐가 더 필요한데?
랜들 록스버그:보통 친구 가정집이 재밌기를 바라지는 않지.
랜들 록스버그:그리고 친구 집에서 이렇게 오래 살지도 않고.
케일럽 랜킨:음, 호그와트는
친구 집에 가까웠지. (고개를 까딱인다.) 나는 팔 년을 친구 집에서 살았어.
랜들 록스버그:아⋯ 그래서 나도 여기 팔 년 동안 가두겠다?
케일럽 랜킨:팔 년⋯⋯ (깜빡.) 그럼 우리 몇 살이지. 스물다섯?
케일럽 랜킨:그랬지, 록스버그 형. 그 시즌이면 매번 집에 가 있었어서 잠시 깜빡했네.
케일럽 랜킨:(대답 대신 중지 올려 준다.) 스물여섯이면⋯⋯,
일 년 남았다. 스물일곱까지.
나 어릴 땐 내가 스물일곱 살에 요절할 천재인 줄로만 알았어⋯⋯. (고개를 까딱인다. 안으로 들어가면 안 돼?)
에이미 와인하우스나 커트 코베인이나, 지미 헨드릭스. 뭐 그런 사람들 있잖아. 위대한 사람들은 다 스물일곱에 죽어.
랜들 록스버그: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신머리는 어릴 때부터 희한했군. (안으로 들어간다. 케일럽은 아마 눈치 못 챘겠지만⋯ 반대쪽 손에 아까부터 계속, 여태껏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문다.)
KP:냉장고에 처박혀 서늘하게 식고 말라붙었던 샌드위치는 그나마 좀 미적지근해진 상태입니다.
마요네즈에 버무린 참치, 달걀과 양상추. 토마토. 흔해빠진 마트용 샌드위치의 맛이 납니다.
케일럽 랜킨:(그제야 따라 들어간다. 샌드위치엔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인다.) 몇 살까지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랜들 록스버그:(입맛 떨어진다.) 너? 아니면 나?
케일럽 랜킨:너지, 그럼 나겠냐? (완전히 안으로 들어선다. 반사적으로 소파로 향한다.)
랜들 록스버그:백여섯 살. 쪼그랑 할아버지 될 때까지.
케일럽 랜킨:아. 그래. 마법사들은 오래 산댔지. 짐승도 잡종이 순혈보다 오래 사는데, 그럼 일 없으면 나는 그것보다 더 오래 살아? 인생 씨발 존나 길다⋯⋯.
(손을 꼽는다. 백여섯. 하나. 둘⋯⋯) ⋯⋯씨발 구십 년?
구십 년간 이 짓은 못 해. 더 일찍 죽겠다고 해.
간단한 일이네. (바로 옆 소파 등받이에 몸 구긴다.)
케일럽 랜킨:그건 싫어. (다시 이불을 온몸에 둘둘 만다.) 그러니까, 아직 아무것도⋯⋯,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않았고⋯⋯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았으니까. (웅크리고 눕는다.) TV 틀어 봐⋯⋯ 지금 뭐 해?
랜들 록스버그:(우물거리고 있던 샌드위치를 전부 삼켰다.) 야, 랜킨. 인생이 네 마음대로 통제 됐으면⋯ 네가 그러고 살고 있겠냐?
하물며 네 인생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내 인생이 되겠냐?
(대답 안 듣겠다는 듯이 바로 TV를 틀었다. 이번엔 리모콘으로.)
KP: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무어라 웅얼거리며 대답했을 테지만, TV 소리에 묻혀 듣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인어 공주는 끝났습니다. 지금은 백설 공주가 하고 있네요.
크리스마스용 영화들은 아니에요. 정말로 크리스마스용 영화들은 아니죠.
케일럽 랜킨:(백설공주의 노랫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기묘한 불협화음이 된다.) 노래 좀 그만 부르게 해봐.
랜들 록스버그:(채널 몇 개 더 돌린다. 뉴스 하나?)
KP:채널 몇 개를 돌리자 곧 뉴스가 나옵니다. BBC입니다.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는 연쇄 실종 사건에 대해서, 콜로라도 주립 대학 소속의 프로파일러 서머싯 씨는 피해자들이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며⋯⋯.」
케일럽 랜킨:노래 끊으랬더니 이젠 뉴스를 트네. 나 놀리냐?
케일럽 랜킨:TV를 끄고⋯⋯ 음⋯⋯ 제안할 게 있어.
가서 잠을 자⋯⋯. 왜냐하면,
왜냐하면 나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서⋯⋯ 잠들 것 같은데⋯⋯.
잠들면 네가 허튼 짓 할까 봐 무서워서 못 자겠어.
랜들 록스버그:그냥 네가 네 방 들어가서 자는 게 어때?
케일럽 랜킨:(대답 없이 몸을 일으킨다. 마른세수 두 번.)
(흰자위엔 실핏줄이 터져 있고, 안색은 허옇게 뜨다 못해 질렸다.) 그럼 나도 안 자.
(왼손 엄지를 자근자근 씹기 시작한다.) 뭐든 좋으니 알아서 해. 나가는 것만 빼고.
랜들 록스버그:약속까지 했으면 믿는 척이라도 하지?
(힐끔.) 진짜야?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눕는다.) 나 마법 잘 해, 록스버그. 누구랑은 다르게.
기억하는 게 이로울 거야⋯⋯. (목소리가 느리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TV 볼 거라고, 야.
케일럽 랜킨:너 진짜 성가시다. (으윽,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다.)
랜들 록스버그:그래, 그래. (등 떠밀면서 케일럽을 방으로 데려간다.)
KP:이 집의 계단은 층고가 참 높아요. 위험천만하죠.
케일럽은 강제 정신력, 랜들은 강제 민첩 판정!
근데 랜들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준다 ㅋㅋ
ㅋㅋ
이것 뭐예요~??
KP:몇 개나 된다고, 얼마 오르지도 않은 계단에서 그가 발을 삐끗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바닥을 뒹굴기 전, 당신 덕분에 몸을 지탱하긴 했습니다.
랜들 록스버그:워우. (케일럽 등 퍽 잡아준다.)
계단이 너무 위험하잖아⋯ 네가 먼저 죽게 생겼는데?
정신 좀 차려.
케일럽 랜킨:그러니까 내가 거실에 있겠, ⋯⋯. (안색이 흙빛이 된다.)
토할 것 같아⋯⋯.
(거의 기다시피 하며 계단을 다 오른다.) 너 빨리 내려가, 그냥.
랜들 록스버그:(아득한 높이의 계단을 내려다본다.) 이 계단 언젠가 사람 죽이겠다.
(그 말을 끝으로 몸도, 정신도 아직까진 멀쩡한 랜들이 아래로 내려간다.)
저녁 쯤에 깨우러 갈게.
KP:죽는 게 당신은 아니었습니다. 다행인 일입니다.
케일럽은 이제 2층에 있고, 당신은 1층으로 내려왔습니다.
비로소 자유입니다. 무엇을 할까요?
랜들 록스버그:(그럼 이제 허튼짓 좀 해볼까?^_^)
KP:정신병자를 너무 오래 놀아줬죠? 슬슬
허튼 짓을 해볼 시간입니다.
랜들 록스버그:(먼저 1층 욕실 좀⋯ 씻지를 못했다.)
당신은 욕실로 향했습니다.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공기가 뺨을 간지럽힙니다.
작은 욕조 옆엔 입욕제가 두세 개쯤 나와 있고, 샴푸와 바디워시 등의 세면도구가 꺼내져 있습니다.
세면대엔 당신의 얼굴이 비치는 평범한 화장실입니다.
다만 기이하게 느껴지는 건⋯⋯ 발 밑의 물기?
뭔가를 바닥에 대고 박박 씻은 듯, 나뭇바닥이 습기를 머금어 축축합니다.
KP:시카고에 갔다고 했죠. 가족 전부가요. (그걸 당신이 믿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것치곤 가족 전원의 세면도구가 이곳에 있습니다.
단순히 두고 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쩐지 아다리가 맞지 않는 느낌을 받아도 어쩔 수 없죠.
케일럽 방 지금 들어가면 잠 깨려나?
랜들 록스버그:(몰라. 걍 올라가야겠다. 2층 방으로.)
층고가 높은 계단. 그렇지만 확실히, 멀쩡한 사람이라면 발을 헛딛어 미끄러질 정도로 위험천만하진 않습니다.
계단을 올라 2층에 도달한 당신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방에 들어가지 못한 케일럽입니다.
그는 2층을 오른 직후 그대로 잠들어버린 듯, 자신의 방이 아니라 복도의 구석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이쯤이면 잠보단 기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체력과 심력을 소모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당신 몰래 어떤 불온한 짓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To GM): 케일럽이 잠들었습니다. 술자가 잠들었으므로 랜들과 집안에 걸린 마법의 힘이 약해져, 그가 숨기는 것들을 파악하기 위한
정신력 판정에
보너스 다이스가 붙습니다.
랜들 록스버그:(음⋯ 랜들은 정말이지, 미친 집구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일단은 케일럽을 지나쳐서 그의 방 안쪽으로 들어간다.)
집구석이 미친 건지 집주인이 미친 건진 몰라도, 하여간에 당신은 그의 방에 진입합니다.
당신이 일어난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후 누구도 이 방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KP:랜들, 강제
정신력 판정 진행합니다.
지금부터 GM이 종료를 선언하기 전까지 모든 정신력 판정에 보너스 다이스가 붙습니다.
혹은 마법 판정도 괜찮습니다. 원한다면!
참고로, 이번의 마법 판정은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단 마법을 감지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랜들 록스버그:(에⋯ 좋아.
루모스 막시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지팡이 끝이 번뜩이는 일은 없으며,
이쯤 되면 싫어도 눈치챌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문제가 있거나, 당신의 지팡이에 문제가 있거나, 이 집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셋 다거나.
KP:빛이 터져 나오지 않는 지팡이의 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이 방 안에 흐르는 불온한 공기.
도무지 한 번을 제대로 발동하는 일이 없는 마법.
랜들, 당신 정말로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게 맞습니까?
강제 정신력 판정.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깃펜입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지팡이로 보였는데요.
(암막 커튼 휙 걷고 창문 열어본다.)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 포플러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기분 좋은 소리.
정수리 위에 뜬 태양과 녹색으로 파릇한 이파리. 꽃.
얇은 가디건 한 장 걸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저 멀리 성당에서 종이 칩니다. 하나, 둘, 셋⋯⋯
⋯⋯아홉, 열, 열하나,
늦봄에서 초여름의 런던이 꼭 이렇습니다.
(집에 달력 없나?)
KP:대답하듯, 산들거리는 바람이 당신의 앞머리를 가볍게 흩뜨립니다.
마침 케일럽의 방에 달력이 걸려 있네요. 확인해 볼까요?
랜들 록스버그:(오늘⋯ 오늘 12월 20일? 달력 뒤적여본다.)
달력이 미친 걸까요, 바깥 세상이 미친 걸까요?
케일럽의 방에 걸린 달력을 믿겠습니까, 당신의 인지능력을 믿겠습니까?
랜들 록스버그:(나가서 케일럽 흔들어 깨운다.)
야, 야.
행운도 괜찮습니다. 원한다면!
KP:랜들, 이쯤에서 잠시 생각을 해 봅시다.
당신이 이 우습지도 않은 깃펜을 흔들며 아구아멘티니 루모스니 할 때, 케일럽이 어떻게 반응했었죠?
그는 분명 말했지 않나요?
KP:케일럽 랜킨이 정말로 지금 이 순간에 도움이 될까요?
잊지 마세요, 행운은 언제나 당신 편입니다.
주어진 모든 상황은 당신을 위해 돌아갑니다.
KP:당신이 뺨을 갈겼는데도 케일럽 랜킨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당신의 행운입니다.
버려 두고 조사하세요. 행운을 믿고.
랜들 록스버그:(볼만한 곳은 다 본 것 같은데⋯)
⋯ ⋯ ⋯.
(그럼 하나밖에 없나. 아래로 내려가서 현관문 열어본다.)
KP:다행스럽게도, 현관문이 밀려 열리기 이전에 당신은 발견합니다.
약간의 변형을 가미한 레펠로 마법의 흔적입니다.
그건 상당한 고급 마법이지요. 방어 주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등 마법에 가해져 있는 변형이 무엇이느냐 하면⋯⋯
누군가 이 방어 마법을 무시하고 문을 열 경우 집 전체에 아주 시끄러운 알림이 울리도록 하는 변형이 가해져 있습니다.
열지 않는 편이 좋겠죠?
랜들 록스버그:(얼마나 지랄할지 가늠해 보다가⋯ 포기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랜들, 강제 정신력 판정.
하나 더 있네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는 걸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까요?
누가 당신의 눈을 가리고 있었을까요?
이쯤 강제 마법 판정도 한 번 해봅시다.
에라이
무언가 불쾌한 찝찝함이 느껴집니다. 마법의 흔적입니다.
당신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것입니다만, 그것의 진짜 정체까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여간에, 랜들.
눈앞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펼쳐져 있습니다. 처음 보는 것입니다.
문이 아가리를 벌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랜들 록스버그:너무 대놓고 기분 나빠서 엄두가 안 나네.
(그래도 내려가 본다. 이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보단 낫겠지.)
이 집안의 계단은 왜 이렇게들 층고가 높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높은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다 보면,
KP:메스꺼운 냄새가 당신의 비강을 세차게 후벼팝니다.
당신은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야 참전 경험이 있으니까요. 대단한 건 아니었으면서도.
무방비한 환경에 오랫동안 방치된, 한때 살아 있던 것들이 부패하는 냄새.
신랄하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시체 냄새가 납니다.
이성치 체크 진행합니다.
지하실의 안은 아주 어둡고, 위에서 쏟아지는 빛을 제하곤 광원이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랜들, 지하실에 도착합니다.
당신은 현재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는 지하실에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앞을 밝히지 않을 경우 관찰 및 기타 시각을 사용하는 기능에 패널티 다이스 두 개가 붙습니다.
(더듬더듬 거리며 스위치 찾는다.)
KP:벽면을 더듬습니다. 작은 플라스틱이 손에 잡힙니다.
압력과 함께 불이 켜집니다.
보지 않아도 됐을 것들. 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들.
지하실의 나무 바닥은 흥건한 피를 머금고, 머금고, 또 머금어서 이젠 붉다 못해 검어졌습니다.
나무가 부패하는 냄새, 그리고 썩은 피 냄새가 뒤엉켜 당신의 비강을 아프게 후빕니다.
부풀어 갈라진 마룻바닥 사이로 작은 살덩이들이 찐득하게 말라붙어 있고, 그 사이 너덜너덜하게 보이는 것은 분명한 사람의 피부입니다.
KP:랜들, 반박할 여지 없는
학살의 현장에 도착합니다.
이성치 체크 진행합니다.
아, 씨발⋯ 진짜.
이 정신 나간 새끼가⋯⋯.
이곳은 아주 덥습니다. 1층이나 2층과는 다르게요.
그러므로 그가, 더 이상 당신을 속일 수 없다는 것 정도가 있겠습니다.
KP:지하실의 내부입니다. 구석에
검은 쓰레기 봉투 묶음 여러 개가 놓여 있고, 그 옆에 큰 삽이 하나 있습니다. 도끼나 줄톱 따위의 섬세한 흉기들도 보입니다.
그 옆에는 아직 봉투에 담기지 못한 듯한 시신이 두어 구 보이는데,
원한다면 이쯤에서 관찰을 해봐도 좋겠습니다.
(코 부여잡고 살핀다. 바닥의 피를 익숙하게 피해서 들어선다.)
KP:당신은 그중 두 구의 시신이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압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계실까요?
분명 회귀했고, 그들은 되살아났는데요.
케일럽 랜킨, 당신을 대신해서 손을 더럽혀 주었네요.
이 또한 행운의 일부일까요? 나쁜 기적이라는 것도 세상에 있을까요?
당신은 계단 아래에 있고, 그는 계단 위에 있습니다.
툭, 밀어서 굴러 떨어지고 나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꼭 이런 위치에 있게 되겠지요.
너 거기에서 뭐 해?
(그는 빛을 등지고 서 있다. 역광이다. 그림자가 져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너 거길⋯⋯,
랜들 록스버그:(표정 관리를 조금도 하지 못한다.)
가까이 오지 마. 죽여버리기 전에.
케일럽 랜킨:어떻게, (목소리가 심하게 경련한다.) 분명 마법은 제대로⋯⋯ 아.
아, 아, 아아아, 아, 아아, 씨발. 씨발. 씨발⋯⋯ 이래서 잠들기 싫었는데.
잠들면 혼동 마법이 풀리는구나⋯⋯.
(그는 여전히 계단 위에 있고, 그 상태 그대로 자신의 머리를 세차게 헤집는다.) 아, 아아, 아,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아! (목소리는 조금씩 높아진다. 이윽고는 비명에 가까워진다.) 왜 거기에 있냐고!
랜들 록스버그:(또 말문이 턱 막힌다. 하⋯ 이 개 같은⋯)
(그리고 그대로 계단을 오른다. 케일럽과 거리가 그대로 가까워지면 그대로 옆을⋯ 비켜주지 않으면 말 그대로 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현관문 쪽이다. 알아버린 이상 알람음 따윈 상관없다.)
케일럽 랜킨:(비명처럼 그가 밀려난다. 아마도 잡으려고 손을 움켰겠지만 랜들 록스버그가 더 빨랐다.)
(그래서 케일럽 랜킨은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짓을 했다.)
스투페파이!
대항할 도리가 없습니다. 대항 자동 실패.
손잡이에서 손이 미끄러집니다. 균형을 잃은 몸이 추락합니다.
바닥에 머리를 세차게 찧습니다. 골이 울리는 것도 잠시입니다.
정신이 순식간에 멀어집니다.
이 시간에 당신은 무언가를 느끼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잠을 깨우길 원치 않았을 텐데도요.
가느다랗게 열린 눈꺼풀 새로 희미한 빛무리가 스밉니다.
케일럽 랜킨은 넘어지고, 깨지고, 구르고 쿵쾅거리면서, 온갖 주문을 마구잡이로 외워 집안의 모든 흔적을 없애고 있습니다.
지하실로 향하는 문은 온데간데없고, 창엔 다시 암막 커튼입니다.
당신은 거실에 '끌려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요.
현관문은 막혀 있고, 아예 바리게이트까지 쳐 놓았군요.
(돌아본다. 귀신처럼.)
랜들 록스버그:(미간을 짚는다. 자신의 손을 몇 번 쥐었다 편다.)
(케일럽 랜킨을 바라보았다.)
기억은 또 놔뒀네.
케일럽 랜킨:아. (두 눈을 깜빡거린다. 아주 느리게⋯⋯ 고장난 자동 인형처럼.)
잊고 있었어.
말해 줘서 고마워.
말로 해. 변명할 기회 줄게.
이리 와서 앉아.
케일럽 랜킨:싫어⋯⋯. (기이할 민치 침착한 목소리다.)
할 말 없어. 무슨 할 말이 있어?
괜찮아. 지워 줄게.
너 진짜 성가시다⋯⋯ 손이⋯⋯ 손이 씨발⋯⋯, (이 즈음 그는 헛구역질을 한다.) ⋯⋯씨발, 진짜 존나 많이 가⋯⋯.
(테이블에 마침 있던 페이퍼 나이프를 쥐고는 목가에 바로 댄다.)
닥치고 와서 앉아.
(그때까지 지팡이를 들고 또 무어라고 주문을 외우던 그는, 당신의 손에 들린 흉기를 보고⋯⋯ 멈춘다.)
(그 상태 그대로 서 있었다. 가만히. 그러다가,) 사람들이,
사람들이 다, 다 너를 죽이려고 하는데,
이제 너까지 너를 죽이려고 하면, 씨발,
그러면 나는 어떡해⋯⋯?
랜들 록스버그:지팡이 줘. 아니면 땅에 두던가.
그리고, 와서, 앉아.
케일럽 랜킨:(손에서 지팡이가 미끄러져 떨어진다. 직접 놓았는지 힘이 풀린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서 있다. 당신을 바라본다.)
(그러다 마침내 움직인다. 걸음은 아주 느리다.)
(의자를 빼고, 앉고, 자세를 바로 한다. 일련의 행동이 사람보단 잘 프로그래밍된 로봇 같았다.)
케일럽 랜킨:(순순히 내미는 대신에,) 너도 그거 내려⋯⋯.
흉기, 다, 다 치웠는데⋯⋯ 왜⋯⋯ 왜 남아 있지? 이해가, (맥락이 와해되기 시작한다.) 이, 이해가 안 돼.
랜들 록스버그:(케일럽의 손을 붙잡아 깍지로 얽는다. 그리고 페이퍼 나이프는 도로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아, 씨발⋯ 팔 아파.
너 때문에 머리도 깨진 것 같아.
이 미친놈아.
그리고⋯ 씨발, 속도 안 좋아.
케일럽 랜킨:(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든다. 와중에도.)
(테이블을 가볍게 쓴다. 나이프가 바닥을 구른다.)
나도 아파, 팔⋯⋯.
너 때문에 머리도 깨진 것 같아.
이 씨발놈아.
그리고⋯⋯ 씨발, 속도 안 좋아.
다 뒤진 얼굴로, 입만 살아서. (주먹 쥐고 한 대 팰 것 같이 위협하다가 도로 내려놓는다.)
케일럽 랜킨:내가⋯⋯, (그는 아주 반사적인 반응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잠시 움찔, 한 게 반응의 전부였다.)
내가, 씨발. 다, 다 가리고,
다 감추고, 가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해줬는데.
왜 자꾸 사고를 쳐? 씨발 새끼야⋯⋯ 왜⋯⋯ 왜 자꾸 내 일을 망쳐?
아침에 물어보려다가 까먹은 게 생각났어.
넌 그동안 내가 죽길 바라던 것 아니었어?
(깜빡. 깜빡.)
(깜빡. 깜빡. 눈을 아주 느리게 감았다가 뜬다.)
몰라.
기억 안 나. 그게 중요해?
랜들 록스버그:(남는 손은 소파 손잡이에 올리고 머리를 괸다.) 중요한데?
넌 날 싫어했잖아.
지금도 전혀⋯ 소중히 생각한다거나, 걱정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야.
케일럽 랜킨:그러면⋯⋯, (말이 느리다.) 네 논리에 맞는 거 아니야?
나는 너를 싫어해. (깜빡.) 지금도 전혀 소중히 생각한다거나 걱정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야. (깜빡.) 나는 그동안 네가 죽길 바랐어⋯⋯.
네 논리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잖아⋯⋯ 된 거 아냐?
됐네. 음. 됐어. (손에 힘을 준다.) 놔. 할 일 있어. 존나 많아. 씨발. 너 때문에.
랜들 록스버그:나 때문에 굳이 해야 할 일이 생기지도 않을 거고.
잠도 잘 수 있을 거고.
그런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는데도?
케일럽 랜킨:─싫다고! (잡힌 손을 비틀어 빼낸다. 시도는 했다. 잘 됐는지는, 그건 당신에게 달렸다. 왜냐하면
행운은 언제나 당신의 편이었으니까.)
이, 이제 와서, 설득, 설득을⋯⋯ 아, 머리⋯⋯ 씨발. (숨 넘어가는 소리.) 아파⋯⋯ 머리⋯⋯.
화 내지 마⋯⋯.
랜들 록스버그:넌⋯ (손 올려서 결국 머리 한 대 주먹으로 쳤다.)
내가 뒤지는 게 싫은 게 아니야.
무서운 거지? 그냥⋯
막연하게⋯ ⋯
내가 죽는 게 뭔가 세상이 잘못된 것 같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 망상 증세 때문에 씨발⋯
'나 괴롭히지 마.' 그러니까,
그러니까, 살아있어.
잖아.
케일럽 랜킨:(타격음이 울린다. 짧은 비명과 함께 몸이 옆으로 넘어간다.)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너무 오래 잡아 늘린 용수철 같다.)
(넘어간 자세 그대로다. 목소리는 아주 느리게 흘러나온다.) 몰라.
기억 안 나⋯⋯. 그게 중요해?
그게, 그게 왜 중요한데?
중요한 건, 내가! (날카롭게 깨진다.) 지금까지 너를, 죽지 않게 해 줬다는 거고!
케일럽 랜킨:네가 이 여름까지, 앞으로도 계속 살아 있는 건 내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씨발 새끼야⋯⋯.
케일럽, 케이, 케이 랜킨. 야.
이제부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랜들 록스버그:(깍지 낀 손 곧장 뿌리쳐 떼어낸다. 테이블 밑 페이퍼 나이프 다시 주웠다.)
(그리고 그걸 케일럽 랜킨에게 겨눈다.)
가까이 오지 마.
케일럽 랜킨:(그러니까, 겨누는 방향이 잘못됐다.)
(케이 랜킨은 멈추는 대신에 그대로 달려든다. 어깨를 붙잡아 밀어 넘어뜨린다. 그 과정에서 그는 베였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아무래도 그의 알 바는 아니었다.)
이리 내!
랜들 록스버그:⋯!! 이, 씹⋯!! (랜들은 반사적으로 칼을 향해 달려드는 케일럽의 복부를 걷어차고 손을 뒤로 빼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상대를 두고 곧장 두 걸음 뒤로 물러난다. 숨을 몰아쉰다.)
케일럽 랜킨:(
케흑,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나자빠진다. 바닥을 구른다. 머리를 두어 번 박는다. 울린다⋯⋯)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만다. 간신히 일으킨다. 숨은 여전히 흐트러진 채고, 앞머리 사이로 탁한 눈동자만 빛났다.) 내가⋯⋯,
내가 더 어디까지 해야 해? 나가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잖아!
다른 거 다, 다 마음대로 하라고!
나가지만 않으면 된다고!
랜들 록스버그:아, 진짜⋯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신경이 바짝 곤두선 탓에, 송글 맺힌 불쾌한 땀 따위를 손등으로 닦아낸다.)
(벼랑에 몰린 랜들 록스버그에게도 한계가 왔다. 케일럽 랜킨의 말이 문장형으로 머리에 박히지 않는다.)
(대신 짧고, 빠르게 계산한다. 한숨을 몇 번 푹푹 내쉬면서. 심장이 쉬지 않고 쿵쾅거린 탓이다.)
죽는 게 쉬울까, 죽이는 게 쉬울까.
케일럽 랜킨:(그러자 케일럽 랜킨이⋯⋯) 록스버그.
(말했다.) 랜들.
화 내지 마. 제발.
제발 화 내지 말고, 그거 내려, 내, 내려 놓고 이야기해.
응? 제발⋯⋯.
랜들 록스버그:스물일곱은 씨발⋯ 나 지금 스물도 못 채웠는데 뒤지게 생겼잖아, 지금⋯.
랜들 록스버그:(홧김에 테이블에 있던 곽티슈를 던진다.) 씨발!!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지금!!
케일럽 랜킨:(그것은 그의 머리에 맞았으나, 그럼에도 비명은 없다. 정신머리가 온통 다른 데 가 있는 탓이다.) 왜?
왜 이렇게 못 살아?
견딜 수 있어⋯⋯ 견딜 수 있다니까? 정말이야. (그건 차라리 간원이나 주술에 가깝게 들린다⋯⋯) 견딜 수 있어.
내가 알아. 견딜 수 있어. 내가 알아. 내가 안다고. 내가⋯⋯,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니까. 정말이야⋯⋯.
랜들 록스버그:아니. 아니, 아니⋯ 그건 아니야. 정말 네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난 네가 싫어⋯ ⋯.
아까부터 긴가민가 했는데⋯ 지금 확실히 알겠어.
넌 선을 넘었어. 그리고 이게 그 결과야.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거야, 랜킨.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아니야⋯.
랜들 록스버그:넌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어.
(그러자 후두둑, 하고,) 왜?
(비명 대신 눈물이 떨어진다.) 왜 어떻게 해줄 수 없어?
통제가 안 돼⋯⋯ 할 수 있는 것도 해도 되는 것도 없는데.
(자간에 호흡이 끼어든다.) 그런데 너도, 너도 어떻게 해줄 수 없으면, 나더러 어떡, 어, 어떡하라고?
가버리라고? 대체 어디로? 내가 어디를 갈 수 있는데?
랜들 록스버그:(랜들은 식은 땀을 흘린다⋯ 방금은 정말로.)
(위험했다⋯ 하마터면 들어줄 뻔했다.)
(그도 그럴게, 랜들 록스버그도 지금 굉장히, 감정에 호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발, 제발 나도 좀 어떻게 해 봐. 나이프를 조금 더 꽉 쥐고, 눈을 감았다 뜨고. 허공에 두었다가 다시 케일럽을 본다.)
지하실의 시체들⋯ 어떻게 했어?
케일럽 랜킨:묻었어. (처음으로 제대로 대답한다.)
내가⋯⋯, 제대로 된 마법사가 아니라서⋯⋯,
나는 진짜가 아니라서⋯⋯,
몰랐어⋯⋯ 잊고 있었어⋯⋯ 지팡이 한 번 휘두르면 다 이룰 수 있다는 거. 소멸시키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
그 다음부턴 모든 게 화가 나서, 짜증이 나고 귀찮아져서 그냥 거기에 쌓아 뒀어. 그게 다야.
너만 모르면 되잖아? 집안에 시체 썩는 내가 진동하건 말건, 너만 지금이 여름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상관 없잖아.
랜들 록스버그:그럼 지금은⋯ (칼을 내린다.)
흔적 하나 남김없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단 소리야?
잘 숨겼는데, 네가⋯⋯ 네가⋯⋯ 네가 나를 비집고 열었잖아!
잘 닫혀 있었어!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억지로 비집어 열은 건 너잖아!
랜들 록스버그:(그 말에 몇 걸음 다가간다. 케일럽 랜킨 쪽으로.)
그럼, 그것도 결국 어쩔 도리 없는 나를 위한 일이겠지.
난 계속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거야.
이번에도 그냥⋯ 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야. 랜킨. 하지만⋯ 근데.
(이마를 매만지면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연쇄 살인마에게 납치당했다가 겨우 살아났다는 시나리오는 못 쓰게 생겼네.
그래, 그러면⋯ 그렇다면, 이건⋯ 정말 오롯이 너를 위한 일이 될 거야. (페이퍼 나이프를 케일럽의 복부에 세게 밀어 꽂는다.)
너만 살아남아서 영원히 악몽 속에 있는 것보단 나을 거야⋯.
난 덕분에 살인마가 되겠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므로 모든 일은 '어떻게든' 되어 왔으니까.
'마침' 테이블 위에 있었던 페이퍼 나이프나,
한 뼘을 조금 넘는 '적당한' 길이의 날 같은 것들.
그 모든 크고 작은 행운들이 모여 당신의 삶을 구성했고, 그러므로 이번에도 그럴 테니까.
그도 그럴 게, 칼이 정확히 박혀야 할 곳에 박혔기 때문입니다.
대신해서 피를 쏟은 그는 비틀거렸고, 기이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았고,
이제 당신은 혼자고, 술자가 죽었으니 모든 마법이 해제됩니다.
포플러 나무가 흔들리며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지팡이 대신 들고 있었던 깃펜과, 숨겨져 있던 지하실의 문까지 전부.
기분 나쁠 정도로 완벽한 세계는 이제 없고, 장장 반년에 걸친 당신의 실종도 이젠 끝났습니다.
술자가 죽었으므로 모든 마법에서 풀려납니다.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할까요?
랜들 록스버그:(별로 상관없다. 뜨고 있었다면 눈을 감겨준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던 집 전화기를, 그래, 아마 이제는 연결될 수화기를 들어서 경찰에 신고한다.)
(그리고⋯ 경찰이 올 때까지 계속⋯ 계속 죽은 시체 옆에 앉아 있는다.)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는 마룻바닥에 서서히 스밉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덕분에 속에서 으크러지던 정념이 서서히 식어가는 모습을 당신은 볼 수 있었습니다.
바람은 적당히 미적지근하고, 도리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니 어이없을 만치 산뜻한 기분입니다. 포플러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는 간헐적으로 노래처럼 들려 옵니다.
당신의 신고는 성공적으로 수신되었고, 경찰이 도착했습니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일은 잘 끝날 겁니다. 어떻게든.